절단면의 회화: 이윤성이 조각에 보낸 시선
콘노 유키
… 자네가 선택하는 토르소는 매끄럽고 부드럽고 충실한, 그 위에 피가 흘러내릴 때 무엇보다도 미묘한 곡선을 그리면서 흘러내리는 풋풋한 토르소구나. 흘러내리는 피에 가장 아름다운 문양—이를테면 들판을 뚫고 지나가는 평범한 개울이나, 재단된 나이 든 거목이 보여주는 나이테와 같은—을 만들어 주는 토르소구나. 틀림없지 않은가? … 1)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1949 中)
작품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간 이윤성의 회화 작업에서 ‘토르소’는 중심적인 소재로 다뤄져 왔다. 인체의 일부만 남은 조각을 보고 아름다움을 봤다고 작가가 설명한 적도 있다2). 2011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진 <Torso> 시리즈를 보고 작가의 관심사를 캔버스 화면에 옮겼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난관에 부딪힌다. 그가 그린 토르소는 토르소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윤성의 회화에 있고 토르소에 없는 것은 바로 피와 빛이다. 주로 단일한 소재로 된 입체인 토르소는 돌이라는 재료와 시간이 지나온 유물이라는 점에서 빛도 피도 나지 않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비교했을 때 이윤성의 회화에는 토르소에 없던 피와 빛이 주위를 둘러싼다. 과연 토르소에 대한 시선은 어떻게 회화에서 빛과 피로 나타났을까? 오히려 회화 작업이기 때문에 빛과 피를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돌이라는 매체가 빛과 피를 담기는 어렵다. 돌에서 빛은 자발적으로 낼 수 없는 것이며, 피는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표출해야 비로소 신체에 (핏기로) 담길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회화에서 빛과 피는 물감의 물성과 재현을 통해서/아울러서 가시화할 수 있다. 토르소에 없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각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빛과 피는 회화의 형식을 통해서 끄집어낼 수 있다.
이윤성의 회화에서 빛과 피는 캔버스의 하얀 색 배경을 덮을 정도로 퍼져 있다. 회화에서 빛과 피의 분출은 하얀색 배경마저도 잠식하는데, 이는 오히려 하얀 캔버스를 토르소로 이해한 태도라 할 수 있다. 2015년에 열린 개인전 《NU-FRAME》(두산갤러리 서울)을 보면 전시장에 작품 <Danae cut-in>(2015) 시리즈와 이에 상응하는 윤곽선이 전시장 벽면에 보인다. 캔버스에 인물상이 그려져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윤곽선 안에는 비어 있다. 그 형태는 작가가 관심을 보내는 토르소와 형태적으로 유사할 뿐만 아니라 작가가 관심을 가져온 만화의 특성과도 호응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Danae cut-in>과 이에 상응하는 윤곽선은 일반적인 정방형 캔버스가 아닌, 변형된 캔버스들이다. 이미 지적된 것처럼 이 모양은 만화의 컷을 연상시키는데3), 앞서 서술한 토르소에 대한 사고 접근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작품은 소위 말하는 형태가 잡힌 캔버스(shaped canvass)가 아닌, 토르소와 같이 전체 중 일부 손실된 캔버스라 할 수 있다. 이는 만화가 전체 서사의 일부를 작은 네모 안에 클로즈업과 같은 효과를 살리면서 표정이나 감정을 담는다는 성격을 내적으로 공유한 결과이다. 주로 풍경이나 장면으로 그려지는 안정된 구도와 달리, 만화적 기법은 ‘컷’에 기반한다. 컷(cut)이라는 말 그대로 이 네모 안에는 서사와 장면, 감정이 토막 난 형태로 의미가 극대화한다. 일본어로 컷을 말할 때 쓰이는 ‘코마(コマ)’라는 단어가 ‘구분’ 즉 ‘일단 끊어지는 곳’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이윤성의 회화 작업에서 캔버스를 절단면 삼아 전개된다. 말하자면 절단면은 그림으로 표현된 인물의 신체이기 이전에, 캔버스를 다루는 만화적 기법이 토르소의 불완전성과 공명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토르소에 없던 피와 빛은 회화 작업에서, 그 하얀 캔버스를 빽빽이 메울 정도로 퍼져 있다. 인물의 절단면에서 나온 피와 빛은 조각에서 볼 수 없는, 회화 특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토르소를 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시화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전체상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기는 시각에서 보면 일부가 손실된 토르소라는 물건은 시대에 뒤떨어진, 불완전하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토르소는 그 결손의 형태임에도 조명을 받았고, 극히 일부만 남았는데도 사실적인, 마치 실제 인물과 같은 핏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가 토르소에 보낸 시선은 회화 작업에 단순히 가지고 온 모티프에 그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토르소라는 얼굴도 없는 일북 결손된 덩어리가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을 받아서 작가는 이를 만화적 기법에 찾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토르소는 한때 인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은 눈으로 시선을 보내는 만큼 존재감을 가진,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시선을 받고 작가가 본 아름다움은 조각 아닌 회화로, 그 캔버스 공간을 향해, 빛과 핏기를 가시적으로 담게 된다. 토르소의 연장선상에서 <Head of Medusa>의 일련의 작품은 접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은 비단 토르소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작가가 고대 그리스 조각에 본 시선은 다나에뿐만 아니라 메두사의 머리로도 향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는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드는 힘을 지닌 존재이다. 이 신화에 착안해서 만든 조각들도 몇 있지만, 여기서는 서사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화에서 이 존재는 머리를 절단되었는데, 루벤스나 카라바지오의 회화 작품에도 그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시리즈 중 두 작업으로 구성된 <Head of Medusa - Pink>(2022)에 그려진 메두사의 모습은 작가가 토르소에 존재감을 들여다본 것의 연장선상에서 시선을 다루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회화 작업에서 메두사는 눈을 뜬 모습과 눈을 감은 모습으로 각각 표현되어 있다. 메두사를 우리가 직시하는 일, 그것은 그가 살아 있지만 눈을 뜨지 않을 때와 그가 머리만 남겨 눈을 떴을 때 가능하다. <Torso>가 침묵하는 덩어리에 시선을 받았다면, <Head of Medusa - Pink>는 차단된 채 시선을 주고받는다. 메두사를 만났을 때 우리는 눈을 감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눈을 감은 모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메두사에게 우리가 보내는 시선이 되며, 우리가 그의 눈을 직시할 때는 죽어서 절단된 머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감은 눈에 (보는 사람과 메두사의) 살아 있음과 뜬 눈에 (보는 사람과 메두사의) 죽음이 교차한다. 이윤성의 작품은 지난 세기의 인물 조각에 보낸 작가의 관심이 단순히 회화로 치환된 것이 아니다. 작가에게 평면은 신체 일부와 시선이 절단 또는 차단된 곳에서 보는 일=시선을 보내는 일을 다루는 공간이다.
1) 三島由紀夫, 『仮面の告白』, 新潮文庫, 1950, p.140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일본어 원문에서, 번역은 필자에 의함)
2) 인스타그램 게시물, https://www.instagram.com/p/CqZUBx2PnSY/?igshid=MzRlODBiNWFlZA==
3) 임근준 「이윤성의 회화에 관한 비평적 메모」, 정현「구조의 단면」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