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는 미소녀, 10주년 기념 가이드
백지홍
캔버스를 화려하게 수놓는 미소녀. 가까이에서 확인하지 않는다면 붓질의 흔적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게 그려진 화면은 마치 디지털 이미지를 보는 듯하고, 다채로운 색상은 그림에 밝은 분위기를 더한다. 그런데 이러한 밝음은 다소 간의 당황스러움으로 변한다. 미소녀들의 신체는 나체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선정적으로 보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토르소〉 연작에서는 팔다리가 있을 자리에 피가 뿜어져 나오는 폭력적 이미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성과 폭력의 요소들은 앞서 말한 등장인물의 표정과 색상, 무엇보다도 만화적 그림체의 밝음과 대조되며 독특한 이질감을 전한다. 함께 하면 안 될 것 같은 요소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당황스러움. 공공장소에서 보면 안 될 것 같은 이미지를 화이트 큐브의 조명 아래에서 만났을 때의 어색함. 이윤성의 작업은 쉽게 잊히지 않고 신경 쓰이는 무언가가 되었다. 제목과 도상 배치를 통해 서양 미술사의 맥락을 끌어옴으로써 만들어 내는 노출과 폭력에 관한 설득력, 현대 시각문화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일본 대중문화와 관련된 맥락의 풍부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성과 색채, 말끔한 마감을 통해 만들어지는 회화적 완성도는 현대미술의 맥락 안에서 이윤성의 작품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이윤성의 미소녀들은 활동 반경을 넓혀왔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망가와 아니메, 그리고 미소녀
이윤성의 작품에 관한 두 가지 질문에 답해보자. 첫 번째 질문, “왜 미소녀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작가가 미소녀를 그리고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작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미소녀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작가 외에도 많았다는 방증이다. 여기서 미소녀란 단순히 아름다운 소녀의 형상이 아니라, 망가, 아니메[1], 비디오 게임 등 일본 대중문화 전통 속 특정한 표현 방식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을 말한다. 오늘날 ‘망가/아니메’는 다양한 국가에서 고유명사화될 정도로 특수한 스타일이자, 한국의 공공기관에서도 유사 스타일을 사용할 정도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미감이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20세기가 종료되기 직전까지, 한국에서 이러한 일본 스타일은 ‘왜색’으로 불리며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지리적 가까움과 일본의 하청 공장 역할을 하던 산업구조로 인해 일본 대중문화가 물밑에서는 퍼지고 있었으나, 많은 경우 일본의 콘텐츠라는 사실은 숨기고 유통되었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에야 일본 콘텐츠들이 정식으로 수입되었고, 동 시기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일본 문화는 지리적 가까움 이상으로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1990~2000년대 성장기를 거친 이윤성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세대의 대표 작가다. 그림이 좋았는데 접할 수 있는 고퀄리티의 이미지가 망가와 애니메이션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전통적인 회화를 공부하고 그리며 학부시기를 보냈다. 변화는 졸업전시를 앞두고 일어났다. 자신을 미술의 길로 이끌었던 망가/애니메이션풍의 그림을 졸업 작품으로 선보이기로 결심한 것. 디지털로 작업한 〈최후의 심판〉(2010)은 미켈란젤로가 1533년 시스티나 대성당에 그린 동명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미소녀로 바꿔 재구성했다. 육체미를 강조하며 그려졌던 원작의 인물들은 나체로 그려진 미소녀들에게 설득력을 제공했다. 380×290cm의 거대한 크기, 망가/아니메 형식의 그림체, 자주색을 주색으로 한 강렬한 색채까지 이윤성의 〈최후의 심판〉은 졸업 전시에 선보인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이후 이어질 이윤성 세계의 기반이 되었다.
미소녀를 담는 그림체
시각적인 면에서 이윤성 작업의 핵심은 망가/아니메의 ‘미소녀 미학’의 매력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는 대중문화 분야에서 수십 년에 걸쳐 정립된 스타일을 캔버스에 옮기면 되는 간단한 아이디어 같지만, 이윤성의 회화는 망가/아니메 미학을 캔버스에 옮긴 비교적 이른 사례다. 한국 미술계에도 이윤성에 앞서 만화의 형식을 선보인 작가들이 있었으나,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카툰’의 영향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지향점이 다르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으로는 팝아트의 뿌리인 미국 팝아트의 영향과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 세대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다양한 캐릭터들을 관통하는 ‘그림체’를 통해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왔다는 점 역시 이윤성의 차별점이다. 적지 않은 팝아트 작가가 자신을 대표하는 특정 캐릭터를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펼쳐나간 데 반해 이윤성은 망가/아니메 작가들이 그러하듯 미소녀를 담는 그림체 자체를 자신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일본 만화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1928-1989)가 미국 만화 스타일을 변주한 뒤 수많은 후배 작가를 거치며 확립된 신체 표현방식(동그란 이마, 큰 눈, 작고 오뚝한 코, 좁은 턱, 슬림한 체형, 과장된 가슴표현)이나, 채색 방식(여러 그림을 그려야 하는 셀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의를 위해 두 가지 색을 이용한 명암 표현, 비슷한 외모의 캐릭터들을 구분하기 위한 알록달록한 머리카락 색상)은 따르면서 이목구비의 비율이나 색채 조합 등에서 개성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만의 그림체를 만든 것이다. 이윤성은 자신을 매혹시킨 미소녀 미(美)의 정수를 자신만의 해석을 거쳐 선보이고자 했다. 이 점에서 이윤성은 앞서 망가/아니메를 소재로 명성을 얻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나 아이다 마코토와 차별점을 보인다. 이들은 미소녀의 재현 방식을 작업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아름다움’보다는, 그 내부에 자리한 선정성과 폭력성과 같은 일본 사회의 특수한 징후들에 초점을 맞췄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윤성의 미소녀들도 이러한 선정성, 폭력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자극 미소녀, 관능적이고
욕망. 이윤성 작가의 작업에 관한 두 번째 질문 “왜 미소녀의 이미지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가”에 대한 답변을 보다 자세히 풀어보자. 상업적 목적으로 변주된 신체가 대상화되는 것, 다시 말해 작가와 관람객, 창작자와 소비자의 욕망이 투사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자본은 이러한 가능성에 적극적으로 투자한다.[2] 남성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년만화에서 직접적인 성애 표현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여성 캐릭터가 넘어지는 등의 이유로 팬티가 노출하는 일명 ‘판치라’ 장면이나 샤워 장면 등이 ‘서비스 장면’으로 장르 문법화된 것이 대표적이다. 망가/아니메 문화 속에서 성적인 코드는 필요에 따라 노골적으로, 때로는 세련된 방식으로 선보였다. 이윤성 작가의 미소녀는 이러한 발전 과정의 한 끝자락에 자리한다.
‘오타쿠 예술가’라 자칭하는 무라카미 다카시는 피규어 형태의 조각 작품 〈HIROPON〉, 〈나의 외로운 카우보이〉(1997) 등에서 과장된 망가/아니메 스타일의 신체 표현을 불쾌한 영역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미소녀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성도착증적 요소를 표현했다. 아니메 미학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강조하여 자국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던진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과, 나체의 미소녀를 통해 역으로 서양 미술사에서 신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비판/풍자/패러디하면서도, 망가/아니메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이윤성의 작품은 유사해 보이지만, 지향점은 반대 방향에 있다.
고자극 미소녀, 폭력적인
다소 당혹스러운 것은 미소녀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은 이윤성 작가가 첫 개인전《NU-TYPE》에서 선보인 〈토르소〉 연작은 이상화된 신체들의 팔다리를 훼손되고 피가 흩뿌려지는 가학적인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애써 만든 아름다운 신체들을 어찌하여 훼손하는가.
망가/아니메가 품은 또 다른 매력은 감각적인 액션 장면 혹은 폭력성에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만화가 액션 망가 『드래곤볼』이며 오늘날에도 유사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서 방증하듯 말이다. 성애물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장르가 액션활극이라는 상업적인 이유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생생한 기억, 사무라이 문화, 탁월한 표현력을 선보인 작가의 등장[3] 등 일본 문화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폭력과 파괴를 동반한 액션 연출은 발전해 나갔다.[4] 〈토르소〉 연작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1995)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가 전차의 해치를 억지로 열다가 기계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양팔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다.[5] 이윤성 작가의 〈토르소〉를 보았을 때 캐릭터들의 동세에서 〈공각기동대〉가 떠올랐고, 작가는 영향을 인정했다. 망가/아니메의 미학적 성취들은 이윤성 세계를 구성하는 조각들이 된다.
〈토르소〉의 핵심 아이디어는 앞선 〈최후의 심판〉(2010)과 마찬가지로 서양미술사에서 시작한다. 이탈리아어로 ‘몸통’을 뜻하는 토르소(Torso)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상 중 훼손되기 쉬운 머리나 팔, 다리 부분이 잘려 나가고 몸통만 남아있는 형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냄으로써 미술사 속에 자리 잡았다. 오늘날 토르소는 친숙한 형상이지만, 팔다리가 없는 상태를 아름답거나,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학습된 시선이다. 이윤성은 미소녀들의 팔다리를 잘라 토르소 형상을 만듦으로서 부자연스러움을 일깨운다. 이때 망가/아니메 풍으로 이상화된 신체와 절단의 고통과는 무관해 보이는 표정으로 인해 더욱 위악적으로도 보이는 ‘과장’은 신체 훼손이라는 소재의 거부감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할 지점에서 과장된 색상과 형태의 자주-보랏빛 액체가 뿜어져 나오는데, 현실성이 없다 보니 실제 피처럼 보이지 않고 어떤 에너지가 캔버스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화적 내용에 따라 팔다리가 재생하거나, 팔다리부터 변신하는 장면이라 말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는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다루는 아이다 마코토가 팔다리가 잘린 소녀의 이미지를 진지하게 담은 〈개〉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토르소〉는 불편하다. 팔다리가 변신/재생되는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절단면을 분명히 표현한다는 점에서 감상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최후의 심판〉이 받았던 주목 이상으로 많은 주목을 받게 했다. 이후 진행된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신체 절단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토르소〉에서 흩뿌려진 자줏빛 액체는 예외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토르소〉는 이윤성의 대표작으로서 오늘날까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며 제작되고 있다. 첫 개인전의 충격 요법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었든 매우 효과적이었다.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절단/분할과 변신이라는 모티프가 첫선을 보였다는 점에서도 〈토르소〉는 본격적인 작품세계의 시작점으로 중요하다. 지금부터는 작가의 주요 작품들을 살펴보자.
〈토르소〉, 〈수태고지〉
《NU-TYPE》은 〈토르소〉 연작이 첫선을 보인 전시로, 전시장의 중앙에는 삼면화 형식으로 구성된 〈수태고지〉가 자리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알리는 장면이 담긴 중앙 캔버스에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이 휘날리고 있다. 우측 하단 여성의 등에 달린 작은 날개는 그가 가브리엘임을, 우측 상단 여성의 조금은 당황한 표정은 그가 성모마리아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이윤성이 택한 고전적 주제 중 〈수태고지〉는 누드 표현과 관련이 없을뿐더러 종교적 인물들의 신체를 온전하게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세상에 변화가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수태고지 장면은 〈토르소〉 연작이 팔다리부터 시작되는 마법소녀의 변신 장면 같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다나에〉
《NU-FRAME》(두산갤러리 서울, 2015)에서 선보인 〈다나에〉는 예언을 피하려는 아버지에 의해 첨탑에 갇혀 있다가 황금비의 형태로 다가온 제우스의 자식 페르세우스를 잉태한 그리스 신화 속 인물 다나에를 주인공으로 한다. 이윤성은 많은 예술가들이 관능적으로 묘사해 온 다나에를 표현하면서, 오랫동안 갇혀 있으면서 느꼈을 다양한 감정을 각기 다른 세 가지 캐릭터로 묘사했다. 이러한 분할은 〈세일러문〉, 〈프리큐어〉 등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대표색으로 표현되는 마법소녀의 전통을 따랐다.
〈조디악〉, 〈헬리오스〉, 〈메두사〉
〈다나에〉에서 선보인 마법소녀의 특징은 황도 12궁을 미소녀화한 〈조디악〉을 통해 더욱 뚜렷해진다. 2018년 《sub-frame》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헬리오스〉를 선보였던 이윤성은 2019년 《Inside of light》에서 13명의 캐릭터를 330×330cm 크기의 대형 캔버스에 담은 〈조디악〉(2019)을 발표한다. 2021년 《Nu Collection》에서는 황도 12궁을 상징하는 열두 캐릭터의 초상화를 선보였고, 2022년 《SD ZODIAC》에서는 캐릭터를 아이처럼 변형시킨(Super Deforme)[6] 작품을 선보였다. 같은 해 Gallery Joyana에서 개최된 《ZODIAC》에서는 2019년 선보인 것과 같은 황도 12궁 캐릭터의 초상화를 보다 간결하게 변화한 그림체로 선보였다. 〈조디악〉은 이윤성의 작업 중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변주를 선보인 연작이다. 이러한 풍성함은 〈조디악〉이 뿌리내린 망가/아니메 문화 속 ‘마법소녀’의 토양이 비옥하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마법 능력으로 변신하여 활약하는 마법소녀는 망가/아니메를 대표하는 장르다.[7] 태양계의 행성들을 모티프로 하여 한국에서도 국민 만화로 자리 잡은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은 그 대표적인 예로, 〈조디악〉의 직접적 조상과 같다. 《Nu Collection》에서 〈조디악〉 초상과 함께 전시된 〈메두사〉는 메두사의 ‘잘려진 머리’라는 다른 맥락을 담았지만, 얼굴만 선보이는 형태에서는 큰 유사성을 보인다. 〈메두사〉의 얼굴이 ‘세일러문’ 캐릭터와 닮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머리카락을 대신해 자라난 뱀이 그려진 대상이 메두사임을 밝힐 뿐이다.
〈라오콘〉
뱀과 함께하는 육체는 2024년 개인전 《FRAGMENTARY》에서 선보인 〈라오콘〉에서 극대화된다. 헬레니즘 조각의 걸작으로 불리는 〈라오콘〉을 흑백의 회화로 옮긴 이 작품은 〈토르소〉 이후 지속된 ‘절단’의 개념을 비롯하여 작가의 기존 작업을 종합하는 작업이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라오콘과 두 아들을 대신해 그려진 세 여성이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눈을 제외하면 세부 묘사 없이 검은색 선으로 표현된 뱀들로 휘감긴 인물들의 얼굴에 띤 홍조는 고통이 아닌 섹슈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서 작가는 고전을 핑계 삼는다(또는 풍자한다). 나체의 남성이 부풀어 오른 근육을 과시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고, 찡그리기보다는 멍한 표정을 짓는 〈라오콘〉 조각 자체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검은 선으로만 표현된 뱀은 일종의 촉수처럼 보이는데, 가즈시카 호쿠사이의 〈어부 아내의 꿈〉(1814)을 시초로 하여 수많은 일본 성인 콘텐츠에서 여성의 신체를 자극해 온 촉수를 그리스의 뱀과 연결하는 재치가 돋보인다. 뱀이 나타내는 것은 성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흑백으로 그려진 캐릭터 위로 뱀으로 표현된 검은 선이 지나간 모습은 마치 산산이 조각난 대리석 조각처럼 보인다. 전시 제목 ‘불완전한’은 검은 선으로 가려져 전체를 볼 수 없는 상황을 뜻하는 것 아닐까. 작가의 강점 중 하나였던 선명한 색상을 포기하고 택한 흑백은 전시장에 ‘출판 만화 같은 느낌’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말풍선은 그 화룡점정.
이윤성은 ‘성과 폭력’이라는 망가/아니메에서 특수한 표현방식이 발전했으면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보편적인 요소를 작품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일찍이 주목받기에나, 심화, 확장, 변주하며 오래 활동하기에나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단순히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 미적인 완성도를 갖춘 작품으로 만들어낼 회화 실력과 작품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찾아내는 재치 또한 뛰어나다. 무엇보다 이윤성은 미소녀’를 그리고 그 세계를 탐구하는 데 진심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하위문화를 그것을 둘러싼 사회/문화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작업과 달리 그 자체로 미적 가치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며, 망가/아니메 화풍을 표면적으로 차용한 작품이 일러스트와의 차이를 설득하고 현대미술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선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도 차별된다. 이윤성의 폭발하는 미소녀, 다음 10년을 기대하며 20주년 가이드도 작성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쁨을 박제하라
기쁨을 박제하라
이윤성의 <Laocoon>
조새미
만화
이윤성은 동시대 시각 문화와 사물의 복잡한 관계를 만화라는 예술 형식을 통해 재해석한다. 그는 성장기에 경험했던 일본 만화의 영향을 기민하게 수용해 서양 고전과 모에(萌え)적 에로틱과의 상호작용을 모티프로 작업해 왔다.1) 신화 서사에 만화적 상상력을 더해 시각 문화 현상을 탐구해 온 작가가 2024년 개인전에서 심도 있게 탐구하는 주제는 만화 형식 탐구이다. 말과 이미지 사이의 상호작용에도 집중한다.
그렇다면 만화란 무엇인가? 『만화의 이해 Understanding Comics』의 저자 맥클라우드(Scott McCloud, b. 1960)는 만화를 “수용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미학적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의도된 순서로 병렬된 그림 및 기타 형상들”로 정의한다.2) 『미디어의 이해 Understanding Media』 저자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은 만화는 “정보량은 적지만 참가 요청도가 높은 표현 형태이며, (…) 독자의 참여에 의한 완성 혹은 보전을 필요로”3)한다. 또한 만화는 “게임의 세계, 즉 어느 하나의 상황의 모델이며, 그 상황을 확장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4)라고 기술했다.
형식의 발전사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가 풍자화를 주도했고, 퇴퍼(Rodolphe Töpffer, 1799~1846)는 코믹스트립(연속화)의 전형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방드 데시네(Bande Dessinee), 미국의 코믹북(comic book), 일본의 망가(漫畵·マンガ), 그리고 한국의 웹툰이라는 용어는 시간적, 지역적 분화에 따른 만화의 발전 양상을 드러낸다.5) 이렇듯 복잡하게 얽힌 만화라는 매체의 진행 양상을 단순화할 수 있다면, 1930년대 시작된 월트디즈니의 미국 만화와 이 영향을 받은 1960년부터의 일본 만화로 분류할 수 있다. 일본 만화는 다시 1960년대 출생을 중심으로 <우주전함 야마토 宇宙戦艦ヤマト>나 <기동전사 건담 機動戦士ガンダム>를 10대에 본 1세대, 70년대 전후 출생의 2세대, 그리고 80년대 전후 출생을 중심으로 <신세기 에반겔리온 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을 청소년기에 경험한 3세대로 나누어진다.6)
라오콘
이윤성은 1985년생으로 성장기에‘망가’문화의 영향력을 체험했으며, 인터넷 문화와 함께 성장했기에 작업에서도 매체 형식, 유통 경로, 표현 방식에 관한 고민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페인팅뿐 아니라 3D 프린팅을 이용한 조각, NFT 아트 등 다양한 형식 실험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 또한 매체 환경 전환으로부터의 영향 받은 결과이다. 이윤성은 <Laocoon> 연작에서 이전의 <Torso>, <Danae>, <Zodiac> 등의 연작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모티프를 차용했다. 이는 트로이의 신관이자 예언자였던 라오콘이 신의 분노를 사 두 아들과 함께 바다뱀에게 공격당해 목숨을 잃는다는 절망과 고통의 이야기이다.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19)는 서사시『아이네이스 Aeneis』에서 라오콘의 죽음의 순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뱀들은 곧장 라오콘을 향해 나아갔다. 먼저 그의 두 아들의 작은 몸통을 친친 감고는 가련한 그들의 사지를 뜯어먹었다. 뱀들은 무기를 들고 아들을 구하러 온 라오콘을 붙잡더니 거대한 똬리를 틀며 감기 시작했다. 뱀들은 그의 허리와 목을 비늘이 있는 등으로 두 번 감은 뒤 머리와 목을 높이 쳐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똬리를 풀어 젖히려고 했고, 그의 머리띠는 시커먼 독액으로 더럽혀졌다. 그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는 제단에 바쳐질 황소가 잘못 겨냥한 도끼를 맞고 다쳐서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렸다.7)
그런데 미술사에서 ‘라오콘’만큼 논쟁적이었던 주제는 없을 것이다. 18세기 독일에서 헬레니즘 조각의 정수 <라오콘 군상 Laokoongruppe>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졌다. 미술사학자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은 <라오콘 군상>에서 라오콘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인내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상한다는 듯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사례 edle Einfalt und stille Größe”라며 고대 그리스 미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빙켈만이 고대 그리스 조형예술의 가치를 재발견해 조형적 아름다움에 관한 탁월한 저작을 남겼다면,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은 논문 「라오콘 또는 회화와 문학의 한계에 대해 Laokoon oder uber die Grenzen der Malerei und Poesie」에서 문학과 조형예술의 본질을 규명하고, 두 매체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싱은 문학은 동작을 표현하고(시간), 조형예술은 형태를 표현하는 것(공간)이라고 공식화했는데, 이는 실제로 정지된 순간만을 보여주는 조형예술에 대해 시간적 전후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문학의 우위를 규정한 것이었다.8) 또한 미국의 비평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는 1940년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Towards a Newer Laocoon」에서 모더니즘의 계보를 추적하며 추상미술의 역사적 정당성을 제시했다.9) 예술은 매체 본질적 특성에 근거해 발전하며, 회화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캔버스 본연의 평면성”10)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역사적으로 라오콘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된 논쟁은 새로운 형식을 이야기하기 위한 의도를 가졌다. 이는 형식주의를 강화하며 발전했으며, 20세기 미술의 향방도 결정했다.
이윤성은 <Laocoon>을 통해 문학과 조형예술이라는 매체의 상호 간섭을 받는 만화의 형식을 분석해 개념적으로 완성도 있는 작업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는 2011년 처음 라오콘 서사와 관련된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은 2023년과 2024년에 제작된 작업과 등장인물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 전환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다만 2011년 작(作)은 현란하며 매끄럽다. 디지털로 제작되었고, 디지털 데이터와 프린트로 존재한다. 세 캐릭터는 한 화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군상이 하나의 대리석으로부터 필요하지 않은 조각을 제거해 나가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물리적으로 하나의 개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군상은 세 인물의 오른팔 부분이 모두 소실된 상태에서 발굴되었는데, 작가는 그림에서 소실된 부분을 동일하게 그렸다. 신체의 뒤틀린 방향과 자세, 발과 다리도 조각상과 동일하게 묘사했다. 차이점은 조각이 중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반면 그림은 허공에 떠 있는 상황이거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법구도(俯瞰法構圖)로 그려진 것 같다.11) 적어도 일곱 마리 이상의 현란하고 거대한 뱀들이 캐릭터들과 함께 분출하는 혈액을 배경으로 뒤엉켜있으며, 질식의 압박감으로 몸부림치는 상․하체와 일그러진 표정은 과도하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유혈 낭자한 싸움이 벌어지는 잔혹한 세계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결과로, 호쿠사이(葛飾北斎, ca. 1760-1849)의 우키요에(浮世絵)나 마에다 토시오(前田俊夫)의 <우로츠키 동자 うろつき童子> 같은 공포 촉수물(觸手物) 만화도 연상된다.
반면 2024년 작 <Laocoon>은 무채색이다. 작가는 모에적 캐릭터를 마치 그리스 시대 대리석 토르소처럼 조심스레 다루고 있다. 이윤성은 관계를 알기 어려운 세 캐릭터를 자신 만의 캔버스 속에 독립적으로 배치했다. 성숙해 보이는 여성과 이 여성보다는 어려 보이는 두 여성. 이들 캐릭터의 시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2011년 작의 캐릭터는 눈을 감고 있으며, 2023년 작에서는 군상의 시선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2024년 작의 경우 캐릭터는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캐릭터는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 말과 생각을 건네고, 시간을 공유하는 상호작용의 의지를 발현하고 있다.
데포르메와 감정표현
작가는 캐릭터의 매력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그는 지나치게 큰 가슴과 그에 비해 가느다란 허리 등으로 의도적으로 신체를 왜곡하여 표현했다. 왜곡된 신체 표현은 감정 표현을 강조하며 캐릭터의 감정을 더욱 동적으로 표출한다. 데포르메(déformer)는 미술에서 대상을 과장되게 변형시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만화에서 특수하게 발달했다. 만화는 이른바 데포르메의 체계나 다름없다. 만화를 이해한다는 말은 데포르메의 문법을 이해한다는 말이다.12) 사실 현실에서 신체는 다이어트, 운동, 외과적 수술 등에 의해 변형 가능하지만 만화 혹은 가상의 예술에서는 데포르메를 활용한다.
감정을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림으로 분노, 기쁨, 긴장, 광기, 불안 등 감정적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특성은 만화의 미덕이다. 만화의 프레임 안에서 선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역동성, 무한성, 야만성 등이 표현된다는 점도 그렇다. 만화에서는 감정 표현과 관련한 합의된 표현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십자 모양으로 부풀어 오른 정맥은 분노를, 땀방울은 초조감을, 그리고 이마의 수직선은 낙담이나 절망을 나타낸다. <Laocoon> 캐릭터의 양쪽 뺨에 그어진 사선은 흥분과 분노 등으로 상기된 얼굴의 만화적 표현이다. 작가는 캐릭터의 시선 변화와 밀도 있는 만화적 감정 표현을 통해 캐릭터의 매력도를 높였다. 만화는 감정 표현의 밀도가 가장 높은 표현 형식인데, 과장된 감정 표현에 관해 만화적이라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13)
말풍선과 홈통(gutter)
말풍선은 만화의 형식적 근간 중의 하나이다. 말풍선이 혁명적인 이유는 이야기를 읽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시각에서 청각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14) <Laocoon>(2023-24)에는 소리에 관한 감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작가가 말풍선 안의 ‘말’을 생략했기에 소리가 진공 속에 숨어버렸다. 소리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화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하나이고, 만화의 시간은 항상 지금이며, 하나의 칸, 보고 있는 그 칸만이 현재에 붙잡혀 있다.
말풍선의 경우 화면보다 커질 수 없으므로 크기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말풍선의 기본 모양은 인물과 말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일본 만화는 다른 문화권의 만화보다 역동성이 돋보이는데 그 이유는 일본어는 세로쓰기하며, 세로로 긴 칸이 가로로 긴 칸보다 더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때문이다.15) 또한 작가는 바다뱀을 평면적으로 표현했다.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말풍선의 꼬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화면의 백그라운드 자체가 말풍선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꼬리 형태의 형태적 유사성은 이들 미소녀에게 고통을 가하는 주체가 암흑 혹은 절망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홈통 또한 만화의 핵심이다. 홈통은 두 개의 별개의 장면을 하나의 발상으로 변화시킨다.16) 만화의 칸들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분할한다. ‘홈통’으로 보이는 만화의 형식 요소를 적용해 한 화면 안에서 정지된 순간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을 암시하는 구조적 장치를 대입할 수 있다. 이 선들은 순간 이동, 동작 간 이동, 소재 간 이동, 장면 간 이동 등과 같은 구체적 기능을 담당하기보다 숏폼(Short-form)의 화면 전환 기법과 같은 영화적 편집 기술을 닮아있다. 만화에서는 공간이 영화에서 시간의 역할을 한다는 이론에 근거해17) 작가는 만화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공간 분할로 드러냈다. 작가는 화면을 의도적으로 만화의 공식에 따라 분할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표현했다. 작가는 만화적 변주를 통해 고전적 의미의 시점도 재해석했다. 말풍선을 통해 공기 원근법을, 홈통을 통해 선 원근법을 한 화면 안에서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정지된 예술에서 시간의 작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어떤 방법을 채택할 수 있을까? 말풍선, 홈통을 통해, 다시점을 통해 시간을 표현한다면 캐릭터가 화면 안에 머무는 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작가는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다시점 정물화에서처럼 물리적 조건의 재현 불가능성을 확인하며 한 화면에 여러 시점을 혼용했다.
평면성(flatness), 물질성(materiality), 캔버스의 틀(frame of the canvas)
<Laocoon>(2023-24)은 아이패드 드로잉에서 시작되었다. 이윤성의 디지털 에스키스는 태생이 좌표와 벡터 수치로 지정된 디지털 데이터로 과거에 화가들이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기 전 수채화나 연필 등으로 그릴 작품의 청사진을 그렸던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림의 단계에 접어들면 작가는 동시대 기술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상황에서 캔버스의 밑칠부터 화면의 세부까지 노동집약적 과정을 통해 완성한다. 작가의 작업은 태생은 디지털 데이터이지만 존재 양식은 사물적이기를 희망한다. 그가 캔버스 위에 수고롭게 그린 이미지는 물감의 바인딩(binding)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삶을 영위할 물적 토대를 마련했다.18) 디지털화가 세계를 정보화함으로써 탈사물화하는19) 자명한 현실에서도 작가의 이미지는 캔버스라는 물적 토대에 물질적으로 붙어있음으로써 존재함을 드러낸다.
이윤성은 기쁨의 감정을 캔버스에 붙잡아 놓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행복과는 다른 감정으로서의 기쁨. 예측할 수 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며, 위험과 곤란한 가운데서도 다시 나타날 수 있는, 본질상 유동적이고 통제 불가능한20) 삶의 원동력이 기쁨이다. “나는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영원한 절정과 카타르시스를 표현하려 한다.”21) 작가는 기쁨이라는 감정의 형식과 작동 방식에 관한 시지각적 탐구에 집중했고, 만화에서 방법론 찾았다. 작가는 말풍선, 홈통과 같은 만화의 핵심 요소를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캔버스 위의 시간과 공간을 만화적으로 확장했고, 캐릭터의 시선을 관객에게 향하게 만듦으로써 매력도를 상승시키는 주관적 움직임의 경험도 생성했다.22)
디지털 시대의 만화는 종이에서 스크린으로 삶의 환경을 옮겨갔다. 디지털 만화 플랫폼은 국경과 시간의 제약을 붕괴시켰다. 이제 누구든 AI 생성 기술을 활용해 손쉽게 이미지뿐 아니라 영상까지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AI 애니메이션 캐릭터(AI Anime Character)는 AI 생성 기술로 제작되는 가장 인기 있는 대상 중의 하나이다. 인공지능은 계산한다. 정보는 급증하고, AI 생성 예술(AI-generated art)에 관해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의 정당성을 검토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윤성의 작업은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가 지시 대상인 실제를 제거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실재를 제작하는 것에 비해23) 이윤성의 작업은 존재하는 것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1) 오타쿠(オタク) 신어인 ‘모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소녀 캐릭터 등에 사랑에 가까운 애착을 품는 것을 일컫는 은어이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모에 요소로는 고양이 귀, 메이드 복장, 더듬이처럼 삐친 머리, 데포르메 등이 있다. 오타쿠는 서브컬쳐 집단의 명칭으로서 1983년 나카모리 아키오(中森 明夫, b. 1960)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로 망가·아니메 따위에 과도하게 열중하고 집착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옮김, 『동물화하는 포스트 모던』 , 문학동네, 2001, p. 84-86.
2) 스콧 맥클라우드, 김낙호 옮김, 『만화의 이해』, 비즈앤비즈, 2020, p. 28.
3) 마샬 맥루한, 박정규 옮김, 『미디어의 이해』,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7, p. 188.
4) 마샬 맥루한, 박정규 옮김, 『미디어의 이해』,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7, p.194.
5) 박석환 ‘한국의 근현대사를 조망한 웹툰과 그 의미’ in: 『아트뷰』 vol. 152, 성남문화재단, 2020.08 & 09, p. 14.
6) 1 세대에서는 SF적 상상력과 거대서사를 희망했다면, 3세대에서는 미스터리나 게임에 관한 관심을 주를 이룬다.
7) 베르길리우스, 천병희 옮김, 『아이네이스』, 숲, 2007.
8) 이 논쟁은 동시대 미학에서 매체 간 상호관계성을 탐구라는 주제로 수렴되었다. 유현주, 「예술 경계의 인식에 대하여 - 레싱의 『라오콘』과 상호매체성」,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2019, 40(0), pp. 281-298.
9) “Towards a Newer Laokoon.” 1940, Partisan Review (July-August 1940); Clement Greenberg: CEC, I/3 (pp. 23-38). 클레멘트 그린버그, 조주연 옮김, 『예술과 문화』,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4, pp. 325-343.
10) 클레멘트 그린버그, 조주연 옮김, 『예술과 문화』,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4, pp. 340.
11) 홍세섭(1832-1884)의 「유압도(游鴨圖)」 참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189
12) 예를 들면 디즈니에는 디즈니 특유의, 그리고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虫, 1928-1989)에게는 데즈카 고유의 데포르메 형태가 있다. 우리는 작품을 볼 때 암묵적으로 그 데포르메의 콘텍스트를 받아들임으로써 그곳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사이토 타마키, 이정민 옮김, 『캐릭터의 정신분석』, 에디투스, 2021, p. 72.
13) 사이토 타마키, 이정민 옮김, 『캐릭터의 정신분석』, 에디투스, 2021, p. 96.
14) 미술에서 말풍선이 발견되는 지점은 중세 종교화이다. 독일 화가 베른하르트 슈트리겔(Bernhard Strigel, 1461-1528)의 <성 안나와 천사 The Annunciation to Saint Anne>(ca. 1505-10)에는 천사의 입에서 글이 적힌 두루마리가 나오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15) 현대 만화에서 말풍선의 기본 모양은 보통형, 구름형, 폭발형의 세 가지로 나뉘며, 보통형은 일반적 대사, 구름형은 독백, 그리고 폭발형은 큰 소리를 암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보통형은 네모 칸과 타원형으로 구분되는데, 서구의 만화는 네모 칸을, 동양 만화는 타원형을 선호한다. 서구 만화가 네모칸을 선호하는 이유는 대사의 분량이 많아서이다. 박인하, ‘말풍선의 마술’, 「한겨례 21」, https://h21.hani.co.kr/arti/COLUMN/153/31942.html 2012-05-03, 접속일 [2024년 2월 18일].
16) 스콧 맥클라우드, 김낙호 옮김, 『만화의 이해』, 비즈앤비즈, 2020, p. 74.
17) 스콧 맥클라우드, 김낙호 옮김, 『만화의 이해』, 비즈앤비즈, 2020, p. 15.
18) W.J.T. 미첼, 김전유경 옮김,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의 삶과 사랑』, 그린비, 2010, pp. 52-53.
19) 한병철, 전대호 옮김, 『사물의 소멸』, 김영사, 2022, p. 10.
20) 리베카 솔닛, 최애리 옮김, 『오웰의 장미』, 반비, 2021, pp. 139-140.
21) 이윤성 『NU』, 2015, p. 41. 비평가 임근준은“삶과 죽음의 순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열락, 즉 유한한 욕구를 넘어서는 큰 기쁨”으로 기술했다. 임근준 aka 이정우, 「이윤성의 회화에 관한 비평적 메모」 in: 이윤성 『NU』, 2015, p. 17.
22) 동작선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행로를 나타내는데, 이는 배경에 선으로 속도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발전되었으며, 이후에는 움직이는 물체를 바라보는 것이 흡인력이 있다는 가정 하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물체 자체가 된다는 의미의 “주관적 움직임”이라는 기법으로 발전했다. 스콧 맥클라우드, 김낙호 옮김, 『만화의 이해』, 비즈앤비즈, 2020, p. 122.
23) 한병철, 전대호 옮김, 『정보의 지배』, 김영사, 2023, p. 90.
절단면의 회화: 이윤성이 조각에 보낸 시선
콘노 유키
… 자네가 선택하는 토르소는 매끄럽고 부드럽고 충실한, 그 위에 피가 흘러내릴 때 무엇보다도 미묘한 곡선을 그리면서 흘러내리는 풋풋한 토르소구나. 흘러내리는 피에 가장 아름다운 문양—이를테면 들판을 뚫고 지나가는 평범한 개울이나, 재단된 나이 든 거목이 보여주는 나이테와 같은—을 만들어 주는 토르소구나. 틀림없지 않은가? …
1)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1949 中)
작품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간 이윤성의 회화 작업에서 ‘토르소’는 중심적인 소재로 다뤄져 왔다. 인체의 일부만 남은 조각을 보고 아름다움을 봤다고 작가가 설명한 적도 있다2). 2011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진 <Torso> 시리즈를 보고 작가의 관심사를 캔버스 화면에 옮겼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난관에 부딪힌다. 그가 그린 토르소는 토르소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윤성의 회화에 있고 토르소에 없는 것은 바로 피와 빛이다. 주로 단일한 소재로 된 입체인 토르소는 돌이라는 재료와 시간이 지나온 유물이라는 점에서 빛도 피도 나지 않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비교했을 때 이윤성의 회화에는 토르소에 없던 피와 빛이 주위를 둘러싼다. 과연 토르소에 대한 시선은 어떻게 회화에서 빛과 피로 나타났을까? 오히려 회화 작업이기 때문에 빛과 피를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돌이라는 매체가 빛과 피를 담기는 어렵다. 돌에서 빛은 자발적으로 낼 수 없는 것이며, 피는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표출해야 비로소 신체에 (핏기로) 담길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회화에서 빛과 피는 물감의 물성과 재현을 통해서/아울러서 가시화할 수 있다. 토르소에 없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각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빛과 피는 회화의 형식을 통해서 끄집어낼 수 있다.
이윤성의 회화에서 빛과 피는 캔버스의 하얀 색 배경을 덮을 정도로 퍼져 있다. 회화에서 빛과 피의 분출은 하얀색 배경마저도 잠식하는데, 이는 오히려 하얀 캔버스를 토르소로 이해한 태도라 할 수 있다. 2015년에 열린 개인전 《NU-FRAME》(두산갤러리 서울)을 보면 전시장에 작품 <Danae cut-in>(2015) 시리즈와 이에 상응하는 윤곽선이 전시장 벽면에 보인다. 캔버스에 인물상이 그려져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윤곽선 안에는 비어 있다. 그 형태는 작가가 관심을 보내는 토르소와 형태적으로 유사할 뿐만 아니라 작가가 관심을 가져온 만화의 특성과도 호응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Danae cut-in>과 이에 상응하는 윤곽선은 일반적인 정방형 캔버스가 아닌, 변형된 캔버스들이다. 이미 지적된 것처럼 이 모양은 만화의 컷을 연상시키는데3), 앞서 서술한 토르소에 대한 사고 접근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작품은 소위 말하는 형태가 잡힌 캔버스(shaped canvass)가 아닌, 토르소와 같이 전체 중 일부 손실된 캔버스라 할 수 있다. 이는 만화가 전체 서사의 일부를 작은 네모 안에 클로즈업과 같은 효과를 살리면서 표정이나 감정을 담는다는 성격을 내적으로 공유한 결과이다. 주로 풍경이나 장면으로 그려지는 안정된 구도와 달리, 만화적 기법은 ‘컷’에 기반한다. 컷(cut)이라는 말 그대로 이 네모 안에는 서사와 장면, 감정이 토막 난 형태로 의미가 극대화한다. 일본어로 컷을 말할 때 쓰이는 ‘코마(コマ)’라는 단어가 ‘구분’ 즉 ‘일단 끊어지는 곳’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이윤성의 회화 작업에서 캔버스를 절단면 삼아 전개된다. 말하자면 절단면은 그림으로 표현된 인물의 신체이기 이전에, 캔버스를 다루는 만화적 기법이 토르소의 불완전성과 공명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토르소에 없던 피와 빛은 회화 작업에서, 그 하얀 캔버스를 빽빽이 메울 정도로 퍼져 있다. 인물의 절단면에서 나온 피와 빛은 조각에서 볼 수 없는, 회화 특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토르소를 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시화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전체상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기는 시각에서 보면 일부가 손실된 토르소라는 물건은 시대에 뒤떨어진, 불완전하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토르소는 그 결손의 형태임에도 조명을 받았고, 극히 일부만 남았는데도 사실적인, 마치 실제 인물과 같은 핏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가 토르소에 보낸 시선은 회화 작업에 단순히 가지고 온 모티프에 그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토르소라는 얼굴도 없는 일북 결손된 덩어리가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을 받아서 작가는 이를 만화적 기법에 찾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토르소는 한때 인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은 눈으로 시선을 보내는 만큼 존재감을 가진,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시선을 받고 작가가 본 아름다움은 조각 아닌 회화로, 그 캔버스 공간을 향해, 빛과 핏기를 가시적으로 담게 된다. 토르소의 연장선상에서 <Head of Medusa>의 일련의 작품은 접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은 비단 토르소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작가가 고대 그리스 조각에 본 시선은 다나에뿐만 아니라 메두사의 머리로도 향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는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드는 힘을 지닌 존재이다. 이 신화에 착안해서 만든 조각들도 몇 있지만, 여기서는 서사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화에서 이 존재는 머리를 절단되었는데, 루벤스나 카라바지오의 회화 작품에도 그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시리즈 중 두 작업으로 구성된 <Head of Medusa - Pink>(2022)에 그려진 메두사의 모습은 작가가 토르소에 존재감을 들여다본 것의 연장선상에서 시선을 다루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회화 작업에서 메두사는 눈을 뜬 모습과 눈을 감은 모습으로 각각 표현되어 있다. 메두사를 우리가 직시하는 일, 그것은 그가 살아 있지만 눈을 뜨지 않을 때와 그가 머리만 남겨 눈을 떴을 때 가능하다. <Torso>가 침묵하는 덩어리에 시선을 받았다면, <Head of Medusa - Pink>는 차단된 채 시선을 주고받는다. 메두사를 만났을 때 우리는 눈을 감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눈을 감은 모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메두사에게 우리가 보내는 시선이 되며, 우리가 그의 눈을 직시할 때는 죽어서 절단된 머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감은 눈에 (보는 사람과 메두사의) 살아 있음과 뜬 눈에 (보는 사람과 메두사의) 죽음이 교차한다. 이윤성의 작품은 지난 세기의 인물 조각에 보낸 작가의 관심이 단순히 회화로 치환된 것이 아니다. 작가에게 평면은 신체 일부와 시선이 절단 또는 차단된 곳에서 보는 일=시선을 보내는 일을 다루는 공간이다.
1) 三島由紀夫, 『仮面の告白』, 新潮文庫, 1950, p.140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일본어 원문에서, 번역은 필자에 의함)
2) 인스타그램 게시물, https://www.instagram.com/p/CqZUBx2PnSY/?igshid=MzRlODBiNWFlZA==
3) 임근준 「이윤성의 회화에 관한 비평적 메모」, 정현「구조의 단면」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Lee Yun-sung : Painting on the cut surface: Lee Yun-seong’s gaze on sculpture
Konno Yuki
… The torso you choose is smooth, soft and faithful, and above all, it is a fresh torso that draws subtle curves as the blood flows down on it. It's a torso that creates the most beautiful patterns in the flowing blood, for example, it is something like an ordinary stream passing through a field or the growth rings of an old, cut tree. Isn't it true? … 1) (Yukio Mishima, Confession of a Mask, 1949)
As can be seen just by looking at the title of the work, ‘torso’ has been treated as a central subject in Lee Yun-seong’s paintings2). He once explained that he saw beauty when he looked at a fragment of a human body with only a part of it remaining. Looking at the series, which ran from 2011 to the present in 2023, we can understand that he transferred his interests to the canvas, but here we run into a problem. This is because the torso he drew is different from a torso. What is in Lee Yun-seong's paintings and is not in the torso is blood and light. The torso, which is a threedimensional body mainly made of a single material, can be said to be an object that neither shines nor bleeds in that it is made of stone and a relic of time. When compared in this way, blood and light that were not present in the torso surround Lee Yun-seong's paintings. How did his gaze on the torso appear in light and blood in the painting? Rather, since it is a painting work, we can say that he was able to draw light and blood on it. It is difficult for the medium of stone to contain light and blood. A stone cannot emit light spontaneously, and blood can be contained in the body (vitality) only when it is expressed through the character's facial expressions or actions. Meanwhile, in painting, light and blood can be visualized through or together with the physical properties of paint and reproduction. Light and blood, which are not present in the torso, or to be more precise, do not appear directly in the visual field, can be brought out through the form of painting.
In Lee Yun-seong's paintings, light and blood spread enough to cover the white background of the canvas. In the painting, the spout of light and blood even makes an inroad on the white background, which can be said to be an understanding of the white canvas as a torso. If you look at the solo exhibition 《NU-FRAME》 (Doosan Gallery, Seoul) held in 2015, the work (2015) series and its corresponding outline can be seen on the wall of the exhibition hall. In contrast to the portrait drawn on the canvas, the outline is empty. The form is not only morphologically similar to the torso he is interested in, but also corresponds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comics he is interested in. The and the corresponding outline drawn on the canvas are not regular square canvases, but modified canvases. As already mentioned, this shape is reminiscent of a comic cut3), which can be thought of again in the thinking approach to the torso described above. Here, the work is not a so-called shaped canvas, but a canvas with a part of the whole lost, like a torso. This is the result of internally sharing the characteristic that comics contain facial expressions and emotions while maintaining a close-up-like effect within a small square for part of the overall narrative. Unlike stable compositions that are mainly drawn as landscapes or scenes, comic techniques are based on ‘cuts.’ As the word cut literally means, the narrative, scenes, and emotions within the square are cut into pieces, maximizing their meaning. Just as the word ‘koma ( コマ)’ used when referring to a cut in Japanese is consistent with the meaning of ‘division’, that is, ‘a place where a cut is made’, Lee Yun-seong’s paintings are created using the canvas as a cut surface.
In the painting work, blood and light not presented in a torso, spread out to densely fill the white canvas. The blood and light coming from the cut surface of the figure can be said to be a unique expression of painting that cannot be seen in sculpture. This can also be said to visualize our gaze on the torso. From the perspective of an idealized overall image, a torso with some parts missing is outdated, incomplete, and worthless. However, the torso is spotlighted despite its defective form, and even though only a small part of it remains, you can see its realistic, blood like that of a real person. Lee Yun-seong's gaze on a torso is not limited to a motif simply brought into the painting. Rather, it can be said that he drew the gaze sent to us by a faceless, missing lump called a torso, using comic techniques. The torso is a ‘thing’ that was once a human being. However, at the same time, it is alive and has a presence to the extent that it gazes with invisible eyes. The beauty he sees after receiving that gaze is not a sculpture but a painting, and it visibly contains light and blood toward the canvas space. It can be said that the series of were approached as an extension of the torso. It can be said that the series of works of were approached as an extension of torsos. The gaze he sees in ancient Greek sculpture is not only directed to Danae, but also to Medusa's head. In ancient Greek mythology, Medusa is a being who has the power to turn anyone who looks at her into stone. There are some sculptures created based on this myth, but here I would like to focus on the narrative. In the myth, this being's head was severed, which is also depicted in paintings by Rubens and Caravaggio. The figure of Medusa depicted in (2022), which consists of two works in the series, can be understood as a work that deals with the gaze as an extension of his look into the presence of the torso. In this painting, Medusa is illustrated with her eyes open and her eyes closed respectively. Our encounter with Medusa is possible when she is alive but does not open her eyes and when she opens her eyes with only her head left behind. If the draws attention to a silent mass, the exchanges gazes while being blocked. Just as when we meet Medusa, we must close our eyes to survive, the closed eyes are the gaze we send to Medusa when she is alive, not dead, and when we look directly into her eyes, it is possible because when we look directly into his eyes, it is a dead, severed head. In short, life (for the viewer and Medusa) in the closed eyes and death (of the viewer and Medusa) in the open eyes intersect. Lee Yun-seong's work is not simply a conversion of the artist's interest in figure sculptures of the past century into paintings. To him, the flat surface is a space that deals with seeing = directing gaze from places where body parts and gaze are severed or blocked.
1) Yukio Mishima, 『Confessions of a Mask』1950, p.140, from Japanese original, translation by the author.
2) Instagram Post, https://www.instagram.com/p/CqZUBx2PnSY/?igs hid=MzRlODBiNWFlZA==
3) Refer to Lim Geun-Jun’s “Critical Memo on Lee Yun-Seong’s Paintings” and Jeong Hyeon’s “Cross Section of Structure”
이윤성의 회화에 관한 비평적 메모
임근준 aka 이정우(미술 · 디자인 평론가)
0. 화가 이윤성(1985-)은, 망가/아니메 문화의 어떤 특성을 필터/스킨으로 삼아 서구 고전 회화의 주제를 하나하나 탐구해나간다.
1-1. 중앙대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한 작가의 득의작(得意作)은, (졸업전 출품용으로 준비한) <앳더래스트저질먼트(at the last
jujilment)>(2010)다. 높이가 3m
80cm, 폭이 2m 90cm에 이르는 이 대작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걸작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 Il GiudizioUniversale)>(1536-1541)을
망가/아니메 양식의 디지털 회화로 번안한 창작물이다.
1-2. 도상학적 기본 구조는 원전을 따랐지만, 작업의 세부를 살펴보면, 원전과는 영판 다른 경우가 많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지옥 불 위로 피어오르는 쾌락의 열기/연무와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과 함께 분출-확산하는 체액의 이미지, 그리고 화면 속의 주요 인물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 전환된 경우가 많다는 것.
예를 들어, 심각한 표정으로 제 몸통에서 벗겨낸 가죽을 손에
들고 섰던 바르톨로뮤 성인은, 제 가죽을 손에 든 채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발 미녀로 대체됐다. 반면, 눈을 부릅뜬 채 천국의 열쇠―황금열쇠와 은열쇠는 각각 잠그고
여는 권능을 상징한다―를 들고 섰던 베드로 성인은, 은열쇠를 손에 쥔 채 황금열쇠를 마치 바나나 보트처럼
타고 앉은 철없는 표정의 녹발(綠髮) 미녀로 바뀌었다.
모든 선행의 책(작은 쪽)을
펼쳐든대천사미카엘을 위시하며,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죄인의 이름을 망라한 악행의 책(큰 쪽)을 펼쳐들고, 모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도록 들깨우는 트럼펫을 불며, 최후의 날이 왔음을 알리던 한 무리의
천사들은, 역시 미녀 군단의 형상으로 교체·제시됐는데, 모든
선행의 책은 핑크색 화면을 띄운 아이패드 크기의 태블릿(성애적 삶의 책?)으로, 모든 악행의 책은 청색 화면을 띄운 소형 TV 크기의 태블릿(금욕적 삶의 책?)으로
교체됐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의 형상 그대로다. 다소 당황한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발을 크게 내딛는 그의 모습은, 이제
막 성에 눈 뜬 소년의 모습 같고,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마리아는 성모(聖母)라기보다는, 성애와 육체적 아름다움의
화신인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모습(풍성하다 못해 화면을 가득 메운 구름으로 이어지는 듯한 모발은 보랏빛)이다. [...]
1-3. 2011년의 작업 메모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의 망가적 재구성”에서 화가는, ‘서양 고전 회화를 차용하는 것이 처음엔 단순한 반항이었을지 몰라도, 점차
과거 대가들의 예술 의지를 엿볼 수 있게 됐고, 그것을 하나씩 짚어나가고 싶다’며, 제 남상(濫觴)하는 작의(作意)를 밝혔다. 즉, 패러디나 오마주와는 다른 차원의, 꽤 야심찬 참조적 창작을 추구한다는
뜻이었다.
2-0. 2011년엔 <라오콘><유디트><토르소><크로노스><피에타><메두사> 등을 제작했는데, <유디트>에서 목이 잘린 남자를 제외하면, 모두 이른바 ‘모에 미소녀’다. 그러한 전치를 시도한 이유, 그리고 그 의미화의 맥락을, <크로노스>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2-1. 이윤성의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로마
시대의 이름은 사투르누스)가 사랑의 신인 에로스를 잡아먹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그 회화 양식이 역시 망가/아니메풍이다. 이 작품이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그림은, 고야(Francisco de Goya)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rn Devouring His Son, Saturnodevorando a suhijo)>(1821-1823)로, 제 자식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시간의 신이 아들 한 놈을 통째로 뜯어먹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번엔, 주제만 동일할 뿐으로,
도상학적 기본 구조부터 상이하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이자,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 혹은 사투르누스는, 시간의 신답게 모래시계를 제 상징으로 삼는다. 하지만, 낫으로 제 아버지를 거세해 살해하고 잘린 성기를 바다에
던진 탓에, 섬뜩한 낫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른손에 시계태엽 장치로 작동하는 거대한 낫을 들고, 왼손으론 사지가 잘려나간 꼴로 죽임을 당한 에로스의 머리를 쥔 채, 피와
내장 기관과 별이 가득한 상상계로 날아오르는 크로노스를 포착한 이윤성의 그림은, 뜨거웠던 사랑마저 좌절시키고
마는 덧없는 시간의 흐름을 한탄하는 우의적 작품이 된다.
2-2. 하지만, 이윤성의
그림에서 크로노스는 여자다. 그것도 미소녀다. 살해 장면을
그렸지만, 전반적인 인상은 안온하고 귀엽고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이는 ‘모에화(모에카[萌え化])’ 혹은 ‘모에 의인화’를 예술적으로 변용한 결과다.
‘싹트다/타오르다’는 뜻의 오타쿠(オタク: 망가·아니메 따위에 과도하게 열중하고 집착하는 사람) 신어인 ‘모에(萌え)’는, 1차적으로 ‘애호하는 미소녀 캐릭터를 볼 때, 가슴에 솟는 흐뭇한
감정’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제 ‘모에’의 의미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단순한 취향이나 성적 페티시 이상의 뜻이 됐다. 심지어
지하철 노선이나 편의점, 기업 브랜드 등을 ‘모에 의인화’해 미소녀나 미소년으로 전치시키는 일도 허다하다.
이윤성의 <크로노스>가
오타쿠 문화에서 숭앙되는 미소녀의 일반적 특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은,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현대의
청년 하위문화에 맞춰 새롭게 갱신하겠다는 화가의 뜻을 드러내는 것으로 뵌다. (크로노스를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켰으니, 작가가 시간의 신에게 일종의 거세를 행한 셈이 되기도 한다.)
주제 인물의 표현에서만 그런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살육의 장면을 귀엽게, 피와 내장 기관을 사랑스럽게 표현한 것 또한 오타쿠 문화의 ‘귀여움(카와이[可愛い])’에 대한 집착을 따랐다.
‘모에’를 “원형적인 요소들의 파편을 긁어모아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상향을 조합해 맞춰내는 방법”이라고 규정한 만화연구가 김낙호를 따르자면, 이윤성의 <크로노스>를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다룬 서구 고전 회화의
어떤 요소나 차원을 ‘모에화’의 문화적 문법에 따라 재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이상향을 도출해낸 그림”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2-3. 하지만 이윤성의 작업에선, 원전성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오타쿠 특유의 동인 문화에 충성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고로, 데이터베이스로서의 원전(들)과 그를 호출해 재조합하는 스킨의 2중 구조를 전제로 구현되는 ‘데이터베이스 소비’도, 그 전개 양상이
일반적인 오타쿠 창작물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일본산 망가/아니메를
보고 성장한 청년이지만, 그에게 ‘모에화’의 법칙은 어디까지나 현대적으로 고전을 재해석하는 필터로서
의의를 지닐 뿐으로, 기왕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대주제는 삶과 죽음의 순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열락(悅樂), 즉 유한한 욕구를 넘어서는 큰 기쁨이다.
2-4. 오타쿠의 기호 체계에서 ‘모에 미소녀’는 소녀로 전화한
성욕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팔루스의 등가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 오타쿠 평론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그래서, 거대하게 확대-구현한
무라카미다카시의<미스 고²(Miss ko²)>―등신대의 피겨라는 이유로 섹스돌을 연상하게 되는―와 남성기 모양의 전투기로 변신하는 <두 번째 임무 고²(Second Mission Project ko² aka S·M·P ko²)>가, 오타쿠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바 있다. (비고: ‘모에’를 보는 눈을 결여한 무라카미다카시는, 대중에게 자신을 오타쿠로 소개해왔지만, 정작 오타쿠들로부터는오타쿠로
인정받지 못했다.) 반면, 진성 오타쿠 작가 미스터(Mr.)가 그려낸 미소녀들의 경우엔, 그것이 사춘기 이전의 소녀로
분장시켜놓은 작가의 성기 중심적 성욕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표방할수록 더욱 부적절하다는
느낌, 즉 바라보기 민망하고 공범자가 된 듯 더럽고 수치스럽다는 느낌―윤리·도덕적 판단에 의한 거부감―이
강화된다. (비고: 그 이율배반적인 면모, 미와 윤리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적 불일치가, 미스터의 예술에선
핵심이 된다.) 하지만, 이윤성의 미소녀들을 바라볼 때, 그처럼 민망하고 불유쾌한 기분을 느끼긴 어렵다. 왜일까? 이윤성의 작업에도 분명히 성적인 코드가 장치돼 있는데.
이윤성의 회화는 망가/아니메 문화의 파생물(즉, 현대 예술의 형식을 취한 2차
창작물)로 오해하기 쉽고, 특유의 ‘모에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서구 고전 회화처럼 구도와 비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바, 일단 조형적으로 아름답다. (이 시대에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회화가 드물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런데, 화가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서양 고전 회화가 구현했던 종교적 열락을 의태(mimesis)하고자 애를 쓴다.
이윤성이 그려내는 분출하는 피와 체액의 소용돌이에선 온화함이랄까, 일관하는
어떤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작가는 초기 작업 메모에서, 분출하는
피와 체액의 이미지라는 대주제에 영향을 미친 원전으로, 오토모 가쓰히로의<아키라(AKIRA, アキラ)>에서
반복되는 폭발 장면, 와츠키 노부히로의<바람의 검심(るろうに剣心 -明治剣客浪漫譚-)>에 등장하는 피의 분수
등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원전에서 제시되는 숭고(sublime)와 이윤성의 그림에서 구현되는 숭고는 질이 다르다. 전자가
히스테리아(histeria)와 테리빌리타(terribilita)의
숭고라면, 후자는 아타락시아(ataraxia)의 숭고. 즉,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자의 숭고다.
3-1. 화가는
2012-2013년 다채로운 <토르소> 연작을
제작했다. 이 작업들은 초기작들과 달리 유화로 제작됐고, 만화/아니메 문법에 충실했던 디지털 작풍을 적절한 수준에서 회화적으로 변화시키는 이행 과정을 필요로 했다.
3-2. 망가/아니메의
문법에서 이상적 육체로 간주될 법한 미소녀들을 토르소의 형태로 고찰한다고는 하지만, 일단 두상을 제거하지
않은 채, 사지, 즉 팔과 다리만을 절단해 토르소로 간주하는
형식이다.
‘모에 미소녀’를 사지가 절단된 토르소의 형태로 고찰하는 이 연작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분출하는 피와 체액의 소용돌이―망가/아니메적 반짝임과 별무리를 동반하는―로, 그것이 육체의 포즈/움직임과 맞물려, 특유의 회화적 시공을 창출한다.
<토르소> 연작엔
참조한 원전이 존재하지 않지만, 어쩐지 맥락상 미켈란젤로의 <미완의
노예상(Unfinished Slaves: Schiavomorente, Schiavogiovane,
Schiavobarbuto, Atlante, Schiavochesiridesta)> 연작―열두 점을 계획했으나 미완성 상태의
다섯 점만을 제작한―을 연상케 한다. 후자가 고통 받는 노예를 그렸다고 하지만, 실상 성애적 열락을 다룬 것으로 뵈듯, 전자도 신체 절단의 하드코어한
성애적 주제를 다뤘다고는 하지만, 실제론 종교적 수준의 열락을 다룬 것으로 뵌다.
이윤성의 ‘모에 미소녀’들도 기호적으로는 소녀로 전화한 성욕에 다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선 ‘모에 미소녀’ 특유의 민망함과 불쾌감, 그리고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추론해보자면, 이윤성의 ‘모에 미소녀’들은, 화가의 성애적 시선에 봉사하는 물신이
아닐 것이다. 그는 ‘모에’를 보는 눈을 가졌지만, ‘모에
의인화’의 형식만을 차용했을 뿐으로, 미소녀를 성애의 현현으로 삼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정말로 그려내고자 하는 주제는, 남성의 성애적 시선이, 타자화한 여성 육체―고전 회화의 누드와 망가/아니메 문화의 ‘모에 미소녀’―와 여타 도상학적 전통―서양 고전 회화와 망가/아니메
문화의 관습적 화면 구성 문법―을 통해 물신화하는 과정인가?)
4. 2014년작 <수태고지>는,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 마리아를 담은 이면화(dyptich)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기 천사를 담은 작은 캔버스
두 폭을 배치한 사면화(quadriptych)다.
표면적으론 (양팔이 잘리고 각각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 하나씩을
잃은)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 마리아가 주인공이다. (아기
천사들은 양팔만 잘렸다.) 하지만, 이 의사-종교화의 진짜 주인공은 인물을 포함한 피와 꽃이 하나의 소용돌이로 휘몰아치는 형상, 그 자체다. <수태고지>는, 망가/아니메의 주요 장면에서 드라마틱한 국면 전환을 위해 관습적으로
반복되는 소용돌이 구도를 회화적으로 전치-재구성한 결과로서, <토르소> 연작을 결산하는 뜻을 지녔을 테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 작업인가? 국면 전환의 에너지인가? 어느 쪽이건, <수태고지>는 제 창작의 다음 국면을 예고한다.
5. 이윤성의 첫 개인전은,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오후 6시 파주 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에서 개막했다.
A Critical Note on Paintings by Yunsung Lee
Text by _ Geun-joon Lim aka Jungwoo Lee (Art and Design Critic)
0. The artist Yunsung
Lee employs particular traits
of the manga/anime culture as a filter/skin to explore subjects of Western
classical paintings.
1-1. For his
graduating work from the
Department of Painting at Chung
Ang University, Lee presented a
painting entitled At The Last Jujilment (2010). Measuring
380cm in height and 290cm in width, this impressive work transformed
Michelangelo Buonarroti’s masterpiece The
Last Judgment, Il Giudizio Universale (1536-1541) into digital painting in Japanese manga/anime
style.
1-2. While
the basic structure of the image follows the original painting,
one can observe completely different
elements from the original painting upon closer inspection of the work. The
most evident difference is the heat/smoke of pleasure over the fires of hell,
the incarnation of Jesus Christ and the erupting secretions, and that the main
figures in the work have been
changed of their gender, from male to female.
For example,
Saint Bartholomew who stands with a serious expression with his own skin in his
hand in the original
painting is replaced by a
blonde bombshell who is holding onto her own skin with an expression of
jubilation in Lee’s painting. Also, St. Peter who stands with eyes open and key of heaven in his hands
— golden key and silver key each symbolizing the
authority to lock and open — is replaced by a beauty with beautiful hair and immature
expression who is riding the golden key like a banana boat with the silver key
in her hand.
An army of
beauties replace the host of angels, including the archangel Michael who is holding the list of souls to be saved (small book), and others who are holding the list of the damned (large book) with the names of sinners who will go to hell, blowing
the trumpet to wake the dead and open their graves, and proclaiming the last
judgment. The
book of souls to be saved
is substituted with iPad-sized
tablets with pink monitors (book of sexual life?), and the book of
the condemned is replaced by a
small TV-sized tablet with a blue
monitor (book of abstinent
life?).
Meanwhile, Jesus Christ is left in his male form in the work. Seemingly in a fluster and surprised as he puts his foot forward, he
looks like a boy who has just had his
sexual awakening, and Maria,
who is kneeling next to him and praying with her hands together, is more like
Venus (voluptuous, with purple-hued hair which turns into cloud and fills the image) as the embodiment of sexual love and physical beauty,
rather than Virgin Mary.
1-3. In his work
statement “Manga Re-composition
of Michelangelo’s The Last Judgment” in 2011,
Lee stated that “while the
appropriation of Western classical painting in my work might have just began an act of rebellion at first, I gradually started to see
the artistic will of the master painters of the past, and to delve into them individually’. (Meaning Lee
pursued quite an ambitious creative
practice of reference, which is a wholly different realm from parody or homage.)
2-0. Lee executed Laocoon, Judith, Torso, Kronos, Pieta and Medusa in 2011.
Except for the decapitated man in Judith,
all the figures are ‘pretty
girls’. Let’s look at Kronosas an example of the reasons for such condition,
and the context of such signification.
2-1. In Lee’sKronos, also
manga/anime in style, the
god of time Kronos (Saturn in Roman) is devouring
Eros, the god of love. Francisco
de Goya’s Saturn Devouring His Son(1821-1823) is the source of inspiration for this work, in which the god of
time is eating one of his own sons in the fear of being killed by his sons. (The basic structure of the image will be discussed here
as the subject is the only element of similarity between the two works.)
Kronos, or Saturn, is the son of Uranus and Gaia,
the god of the sky and the goddess of earth,
and also the father of Zeus. Kronos is aptly symbolized by a sand clock, but also
as a frightening sickle because he castrated
and killed his father with a sickle and threw his father’s penis in the ocean.
Therefore,
Lee’s painting in which Kronos flies into a world of imagination filled with
blood, guts and stars, holding a large sickle which operates as a windup watch in his right
hand, and the head of dead
mutilated Eros in his left hand, is an allegorical work which laments the transient flow of
time that disappoints even the most passionate hearts in love.
2-2. However,
Kronos in Lee’s work is a beautiful girl. And the
scene of her act of murder is peaceful,
cute and even lovely, because Lee’s
works are charged with ‘Moe (萌え化)’, or ‘deep
feelings of affection, adoration, devotion and excitement felt towards
characters in manga/anime’.
‘Moe’, a new word in Otaku (people excessively obsessed with manga/anime) culture, means
‘budding’, and primarily
describes ‘deep feelings of pleasure
when looking at a pretty character’. However,
the meaning of ‘Moe’ has evolved
repeatedly, and now means more than simple taste of sexual fetish: ‘Moe’
characters are everywhere, including even subway lines or convenience store brands what have been symbolized by beautiful characters
charged with ‘Moe’.
The fact that
Lee’s Kronos follows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beautiful girls
reverenced in Otaku culture demonstrates the artist’s will to newly reinvent
Greek and Roman mythology into contemporary youth subculture (Since he turned Kronos
into a female, the artist has in a way castrated the god of time). Such aspects are not only evident in Lee’s expression
of main figures in his work; the cute and lovely expression of flesh, blood and guts
also reflect the Otaku obsession for ‘cuteness’.
According to manga
researcher Nakho Kim who defined ‘Moe’
as “raking in all fragments of original elements and finding and completing
one’s own ideal world”, Lee’s Kronos“recombines certain elements and dimensions of Western classical paintings of
Greek and Roman mythology through the cultural language of ‘Moe’ and arrives at a new ideal world.”
2-3. In Lee’s
work, however, there are no aspects of excessive fixation on the original, or
devotion to the Otaku circle. Therefore,
how he arrives at the ‘Database consumption’ in which is culture becomes simply a database of plots and
characters, is quite different
from usual Otaku product. Although
Lee is a young person who grew up watching Japanese manga and anime, the
idea of ‘Moe’ is none more significant than a filter through which he reinterprets the classical in contemporary way. More
importantly, the ultimate theme that’s always repeated in his past works is the pleasure which reveals itself in the moment of life and death, or
delight that transcends limited desires.
2-4. The general
opinion of Otaku critics is that the ‘pretty
girl charged with Moe’ is
equivalent to the phallus because it’s nothing more than sexual desires
manifest into female form in
Otaku world of symbols. Therefore, Murakami Dakasi’s excessively magnified and embodied Miss ko², which reminds one of a sex
doll because it’s a life-sized doll, and Second
Mission Project ko² (aka S·M·P ko²)
which is transforms into the phallic combat plane evoked strong opposition by
the Otaku. (Note: Without a taste for ‘Moe’,
Murakami Takashi introduced himself to the public as Otaku,
but he was never accepted by the Otaku circle.) On
the other hand, the beautiful innocent-looking
girls depicted by the genuine Otaku artist Mr. are nothing
more than the artist’s phallus-centric sexual desires, which make the viewer
feel a sense of shame, repulsion and violation of their morals and ethics, and
guilt as if he or she has become an accomplish. (Note: The
aspect of antinomy, or the problematic incongruity which occurs in the dimension
of beauty and ethics is the core issue
in the art by Mr. ) On the other hand, although it’s clearly evident that Lee’s work definitely
has sexual code in it, it’s hard to feel the kind of shame and repugnancy when
looking at Lee’s pretty girls.
While it’s
easy to misunderstand Lee’s work as a derivative of manga/anime
culture (a secondary creation in form of contemporary
art) and is true that it has a particular ‘Moe element’, his work is
most importantly beautiful as it fundamentally
pursues the beauty of composition and proportion like western classical paintings. (Let’s remember that it’s rare to see paintings that
pursue formal beauty these days.) Not
only does Lee pursue formal beauty, he strives for mimesis of religious
delight incarnated by Western classical paintings.
There’s a
sense of placidity or peace in the whirlwind of spurting blood and bodily secretions.
In his earlier artist statement, Lee
mentioned that the theme of the image of spurting blood and secretion was
influenced by the repetitive explosions in Akira by
Katsuhiro Otomo, and the
fountain of blood in Rurouni Kenshin by Nobuhiro Watsuki. However,
the sublime proposed in the original source and in Lee’s
paintings are different in quality: While the sublime of the former is that of hysteria and
terribilita, the sublime of the latter is of ataraxia of
someone who knows what he is doing.
3-1. In
2012-2013, Lee produced the diverse Torsoseries. Unlike his early works, they were rendered in oil paint on canvas, and
demanded a transition process which transformed a digital idiom faithful to
manga/anime language to painterly language at an appropriate level.
3-2. While the works claim to observe the torsos of pretty girls, who are deemed to have ideal body in manga/anime language, the torsos in Lee’s paintings have just the heads and
all the limbs cut off.
The whirlpool
of spurting blood and body fluids accompanied by the sparkles and stars characteristic
of manga/anime becomes the focus of this series which contemplates on the limbless
torso forms of ‘Moepretty girls’, and this creates a particular painterly time space,
interconnected with the poise and movement of the body.
While there
is no original work which Lee’s Torso series
makes reference to, it for some reason reminds one of Michelangelo’s Unfinished Slaves: Schiavo morente, Schiavo
giovane, Schiavo barbuto, Atlante, Schiavo che si ridesta, which was planned
to be completed into 12 works but were left as 5 works in unfinished
states. While Michelangelo’s works claim to depict
suffering slaves but actually
seems to deal with sexual pleasure, Lee’s work
seems to deal with pleasure at
a religious level although it claims to portray hard
core sexual pleasure involving mutilation.
Lee’s ‘Moepretty girls’ might be nothing more than symbol of sexual desires
transformed into girls; however, it’s
difficult to feel the sense of shame, displeasure or anxiety particular to ‘Moe pretty girls’ in his painting.
My reasoning
is that Lee’s ‘Moegirls’ do not cater to the artist’s sexual viewpoint, and that Lee has decided not to take the ‘Moe girls’ as an incarnation of sexual love perhaps because Lee has the eye for seeing ‘Moe’ as merely
an important element to adapt into his worn work.
(Perhaps then Lee’s work is about the process of
materializing the male sexual gaze through the otherized female body — the nudes of classical painting and ‘Moe girls’ of manga/anime culture — and other traditions of
iconography such as the conventional image composition language of Western
classical painting and manga/anime culture. )
4. Lee’s 2014
work The Annunciation centers on the diptych of Gabriel and Virgin Mary, with
two small canvases of baby angels on
either side, composing a
quadriptych.
In the painting, Gabriel and Virgin
Mary have lost
both of their arms and legs (baby angels are missing just their arms). However, the main
figures of this pseudo-religious painting are a
phenomenon itself of bodies, blood and flowers swirling in a whirlpool. The Annunciation uses the whirlpool
composition, which is conventionally repeated in major dramatic scenes in
manga/anime, and therefore balances with the Torso series. So then, what is being conceived in Mary? The next work? A turning point? Whatever it is, The
Annunciation seems to herald the
next chapter of Lee’s creative oeuvre.
5. Lee’s
first solo exhibition opens at Paju Make Shop Art Space at 6pm, Friday, May 16th, 2014.
구조의 단면
정 현(건축가)
<프레임 양식>
《Nu-Frame》 전시는 여섯 점의 원화 스케치와 여섯 점의 유화, 그리고 열두 점의 아크릴화로 이뤄져 있다. 작품에 사용된 재료와
도상은 다르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여러 형태의 사각형 프레임들이다. 작가가 2014년 《Nu-Type》 전시에서 서구 신화의 이미지를 아시아의
서브컬처 이미지(아니메, 망가, 게임) 양식으로 치환하는 콘텐츠 생산 방법을 탐구했다면, 이번엔 콘텐츠를 담는 프레임 양식을 탐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전시 작품의 주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Danaë)이다. 하지만 맨 먼저전시장 앞 윈도 갤러리에 놓인 것은 여러 사각형이 합쳐 긴 직사각형을 이룬, 노랑, 파랑, 분홍, 주황, 빨강, 보라의
여섯 가지 단색화들이다. 다음으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작품은 안쪽 깊숙한 곳에 놓인 22x16cm 크기의, 다나에의 흑백 누드 스케치 여섯 점이다. 양옆으로는 파랑, 노랑, 분홍을
주색으로 한 추상 패턴들이 73x117cm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틈새에 끼인 듯 배치된 작품들을 보고 난 뒤, 관객은 돌아나와 안쪽으로
향하는 텅 빈 복도를 마주하게 된다. 복도 끝 벽을 따라 놓인 다나에의 여섯 표정들이 전시장 전체를
가르는 벽에 절반이 가려진 채 관객을 끌어당긴다. 각기 사각형(tetragon),
사다리꼴(trapezoid), 직사각형(rectangle)
등의 형태에 그려진 표정들은 관객의 동선에 따라 순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캔버스들이
윈도 갤러리의 단색화들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다각형의 틀은 고정된 채, 도상, 색, 감정, 효과 들이 바뀌며 얹혀(import)지고, 또 합치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시장의 가장 안쪽은 세 개의 캔버스가 붙어서 완성된 261x194cm 사이즈의
다나에들을 위한 공간이다. 세 다나에를 만드는 총 아홉 개의 캔버스는 결합과 분리가 가능하지만 전체를
연속된 퍼즐 이미지처럼 조합하기 위함도, 또 완결된 이미지를 해체하기 위함도 아니다. 면면이 살펴본 대로 캔버스 프레임은 큰 이미지를 나누거나 연결하지만, 내부의
이미지는 독립적으로 구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구 정면에 놓여 있던 스케치 원화, 그 배경은 이 세 다나에에서 분화해 낸 데이터라고 생각되지만, 별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세 다나에의 전신은 각각 사각형(tetragon) 두 개와 사다리꼴(trapezoid), 혹은 사다리꼴 세 개의 형태가 합쳐[1] 만들어졌다. 만화라는 맥락에서, 틀의
형태는 만화 원고지의 칸을 현실에 확대 재현해 놓은 것 같아 보이지만 어딘가 다르다. 캔버스들 사이의
경계는 딱 달라붙어 일말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칸의 바깥쪽과 안쪽은 그 내부에 놓일 프로그램의
구분이 없는 것처럼 도상이 연속되거나 잘라져서 배열되어 있다. 굳이 만화에 비유하자면 흔한 쇼넨망가(少年漫画, 소년만화)―성적 대상화 양식을 소비하는 소년들을 위한―가 아닌, 쇼조망가(少女漫画,
소녀만화)의 컷 구성에 가깝다.
만화의 칸-경계선은 본래 도상과 시공간을 나누는 시각적 기호이다. 벽 안에는 여러 공간(도상과 시점)의
파편이, 그리고 벽과 벽 사이사이의 여백에는 시간이 끼어들 수 있다는 약속인 것이다. 서양의 코믹스를 기반으로 발전한 일본의 망가 형식이 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층의 소실점에 잡아 두려
했었다면, 다시 망가에서 분화되어 나온 쇼조망가는 극단적인 평면구성―마치
문학이나 잡지의 텍스트 배열 같다― 그 자체이다. 쇼조망가에서의‘칸의 바깥’이란, 매체의
프레임 안에 둘러싸인 또 다른 칸으로 간주된다. 칸의 바깥은 안쪽에 그려진 도상 주변을 떠다니는 물방울, 빛, 식물과 같은―감정과
운동감을 나타내는 효과―상징물들을 담음으로써, 클로즈업된
얼굴과 대비되는 역할을 한다. 이런 현상은 칸이라는 기호에만 종속되지 않는다. 다나에의 얼굴과 머리카락 등 모든 선은 배경과 효과를 담거나 나누는 경계가 되므로 칸 바깥의 오브젝트들은 결국
모든 선을 칸처럼 넘나들며 안과 밖을 뒤섞기 시작한다.
이러한 연출에서 경계-대각선은 극단적인 평면구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압축된 3차원 좌표로도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게임 <드래곤 볼 Z 초 무투전>에서의
연출[2]처럼, 대각선은 화면에서 회전하며 캐릭터 사이 공간의 깊이와 거리를 확장, 축소시키고, 축의 방향도 바꾼다. 회전, 확대, 축소되는 대각선은 구(Sphere)의 표면 위 두 점을 내측에서
연결한 선분이 2차원에 투사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연속적인
구의 표면은 선으로 나뉘어 동시에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분절된 이미지를 담는다.
인물의 표정과 신체, 효과들의 배치는 경계를 중심으로 나뉘고, 합치된다. 혼란스럽지만, 이러한 “맥락 없음”은 잴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들을 가시화한다. 표정과 신체는 감정에 맞춰 미묘하게, 혹은 과격하게 왜곡된다. 쇼넨망가의 양식으로 그려진 다나에의 왜곡된 신체는 쇼조망가의 양식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팎으로 밀려다닌다. 쇼조망가의 공간에서 캐릭터와 배경 사이의 효과-오브젝트들은 도상의
앞과 뒤를 구분 지으며 단 하나의 사건―다나에가 특정한 감정을 분출하며 깡총 뛰어오르는 동작―을 치밀하게 구성하는 것을 돕는다.
이윤성이 지난 전시에서 보여 준 이질적인 두 양식―서구 신화와 서브컬처 만화/아니메/게임의 도안―의
충돌은 매체 형식을 고민하며 또다시 재연되었다. 즉, 소년들의
욕망이 응축된 모에 여성 캐릭터는 다시 소녀들의 욕망에 의해 완성된다. 완성된 평면은 투시도적 환영을
뛰어넘으며 재정의될 것을 요구받는다. 화이트 큐브의 소실점과, 화면
내부의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대각선들이 만나 연성된(transmuted) 키메라는, 프레임 양식의 부분과, 합성된 전체로서 유형(Nu-Type)을 나누고 합쳐 담는 ‘Nu-Frame’으로 명명되었다.
<뷰, 머티리얼, 텍토닉 시뮬레이션(View, Material, Tectonic Simulation)>
이윤성의 작업은 서브컬처 제작자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공간에서 시작하지만 그림은 언제나 모니터를 넘어 실제 크기를 가진
회화로서 화이트 큐브 공간에 놓이게 된다. 작가는 디지털 환경에서도
3차원 좌표의 전시 공간과 구축 방법을 계속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사실 전시를 시작하기 전에 쓴 것이다. 실측된 실제 전시 공간 도면과
작품의 디지털 데이터를 모아서 모니터의 3차원 좌표에서 전시를 가상으로 재현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교하게 가시화된 전시 공간은 현실에 한 발짝 앞서, 작가가
던졌을 법한 질문을 추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a. 캔버스를 개별적으로 제작해 하나하나 그려야 하는 현실과 달리, 디지털 환경에서는
곧바로 최종 직사각형 틀에 맞춰 도상을 그릴 수 있다. 작가는 그림 위에 간단히 레이어를 하나 더 얹어
잘라 내고 싶은 부분을 표시한 가상의 경계선을 그려 놓는다.
b. 이 선은 실제론 깊이도 넓이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적인 선이다. 작가는 선의 레이어를
껐다 켜고, 화면을 줌인-아웃 하며 오브젝트들을 배치했을
것이다.
c. 이제 도상과 경계선은 3차원 공간에서의 실체화를 요구한다. 캔버스의 외곽선 x-y에 z 값이
추가될 것이다. 3차원 프로그램에서 검은 선과 캔버스의 관계를 재연하는 것은, 건축 설계 도면과 건물로의 가상-실체화에 비유해 볼 수도 있다.
d. 하지만 경계선은 맨해튼 마천루의 그리드(Grid)나, 도심 외곽의 집합 주택이 일구는 집합주거 단지(suburban
housing)의 형상처럼 올라타거나(top down), 상승하지(bottom up) 않는다.
e. 오히려 경계선은, 회화의 표면을 따라 흐르며 경계에서 네거티브(-, negative) 깊이 값을 가지며 침하해 선의 주변을 들어올린다.
f.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위해서는 접촉면의 미세한 유격을 만들어야 한다. 캔버스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따내고(Chamfer,) 각각의 캔버스 사이에 임의의 0.x~2mm 간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현실의 캔버스는
결코 완벽한 결합을 이뤄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g. 레이트레이싱렌더링[3]은
이제 2차원 이미지에서 가상의 검은 선을 그림자로 드러낸다. 그림자는
초기 스케치에서의 뚜렷하고 명쾌한 검은색 선이 아니다. 픽셀 이미지를 확대해 보면 마치 물감의 산맥을
파헤친 대지미술처럼 보인다.
3D 프로그램에서 재현된 가상 전시회는 도상에 있던 경계선이 회화에서 필수 불가결한 물감과 캔버스로 번역되는 과정을 드러냈다. 많은 경우 번역은 실패를 암시한다. 하지만 도상 자체가 아닌, 매체를 나누는 경계의 번역은 실패에 따른 불안감보다도 무질서한 현실, 부유하는
감각들을 정돈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준다.
먼저 도상, 이미지를 정리하는 새로운 물질 경계선은 프레임이라는 회화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정의된다. 이것은 단순히 포토샵 상하부에 가지런히 위치한 레이어가 아니다. 질료, 물감 색상, 또
물리적인 깊이 값의 차이를 내며 입체적으로 엮여 있다. 만화적 기호를 넘어 질료와 형태가 이루는 경계면으로
구축 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힘으로도 부술 수 없는 네거티브(-)의 벽, 경계는 이제 이미지와 상관없이 분리될 수 있다. 한편 재조합되어도 틀 사이의 간격은 반드시 남아 있게 된다.
렌더링 이미지에서 1픽셀 정도로 얇게 재현되는 경계선은 수 mm 내외로 실측되는 만화 칸 사이 공백을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스케일을 자유롭게 상상하게 한다. 이는 세계의 바깥과 세계의 중심에서 내부 표면을 포착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인식된다. 전자는 연속된 물감들의 단층―조경(landscape)―을 가로지르는 기하학 패턴 같은 것이다. 예컨대
일상을 뛰어넘는 위성궤도에서 관측되는 댐이나, 도로, 기찻길
같은 인프라스트럭처,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
1944~)의 더블네거티브(Double Negative)의 축소모델을 연상케 한다. 후자는 3D 스페이스라는, 가상세계에서의
내밀한 시점을 현실에 옮겨 놓는다. 즉, 디지털 스페이스에서
구면체로 이뤄진 세계의 안쪽에는 2차원 HDR 환경 이미지[4]가
얹혀지는데, 관측자는 구체 중심부터 소실점 공간까지를 평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요소들의 분리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방식은 이제 캔버스를 단순히 도상을 바라보는 창문에 안주하지 않게 한다. 캔버스는 1:1, 1:x 의 비례를 지닌 추상모델로서, 단순하지만 정교한 텍토닉(tectonic)의 흔적을 표면 요철에서
드러낸다.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는 완성을 지향하지도 않으며, 회화
기법의 흔적은 물질성의 집착과도 거리를 둔다. 그러므로
<Nu-Frame> 전시는 스케치에서 질료와 색이 덧입혀지는, 완성으로의 여정으로만
보기 어렵다. 오히려 관람자는 일찌감치 완성되어 버린 세계의 파편들이 연결되고 부서지는 풍경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그 풍경은 지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복합구성(Composite
Figure)의 기둥-요소들을 꿰어 버리는(penetrate)
뒤틀린 구조-양식의 횡단면(Cross Section)일
것이다.
[1] 사각형 도형의 분류는 사각형>사다리꼴(등변사다리꼴)>평행사변형>직사각형(마름모)>정사각형을 따르게 된다. 작가는 대분류인 사각형과 사다리꼴의 부분들을 합쳐, 유형의 소분류인
직사각형 형태로 크게 만들고 있다.
[2] 만화 『드래곤 볼 Z』를 소재로 만든 게임
중 명작으로 손꼽힌다. 일부는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대전격투게임의
양식을 기반으로 드래곤 볼 세계의 세계관과 물리법칙을 재현하기 위해 시간, 거리를 압축하는 화면 분할
시스템을 도입했다.
[3] 레이트레이싱렌더링은 가상공간에 놓인 오브젝트의 표면에 빛을 쬐고 반사되는 경로를 계산해서 픽셀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이다. 현실과 유사한 렌더링 방법으로 재현도도 높지만, 그만큼 컴퓨터의
사양이 요구되며 효과적인 결과를 내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다.
[4] 하이 다이내믹 레인지 이미징(High Dynamic Range Imaging, HDRI)은
일반 사진보다 훨씬 높은 다이내믹 레인지를 처리할 수 있는 디지털 화상 처리 기법이다. 최초에는 컴퓨터
렌더링 이미지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이후 서로 다른 노출의 여러 사진으로부터 높은 다이내믹
레인지를 갖는 사진을 얻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빛의 변화에 따른 현상(phenomena)의
재현이 가능하다.
The Cross Section of Structure
Hyun Jung (Architect)
<Frame
Type>
The
exhibition Nu-Frame displays 6
original sketches,6 oil paintings and 12 acryl paintings by Yunsung Lee. Although
the material and icons used in the works are different, what they share in
common are various forms of rectangular frames. While Lee explored conceptual
aspects of transposing Western mythological images into an Asian subculture
image type (anime, manga, game) in his previous exhibition Nu-Type in 2014, the focus of this exhibition was to experiment
with the form of the frame which holds such concept.
The
subject of the exhibited works is Danaë from Greek mythology. However,
displayed in the window gallery at the front entrance of gallery are various
monochromatic paintings in blue, yellow and pink, overlapped to produce a long
rectangular works. As one enters the gallery, the viewer confronts six black
and white nude sketches of Danaë, measuring 16 x 22cm each, and on either side,
works measuring 117 x 73 cm, with abstract patterns in blue, yellow and pink. After seeing the works that seem to be
squeezed in the space, the viewer turns around and faces an empty corridor
towards the inside of the gallery. Half hidden behind the wall that cuts across
the gallery, the six expressions of Danaëon tetragon, trapezoid and rectangular
forms on the wall at the end of the corridor allure the viewer along the
viewer’s movement. Here, considering that the canvases
are the same form and size as the monochrome paintings at the window gallery, we
realize that the image, color, emotions and effects can be interchanged and
integrated on the fixed polygonal frames.
Deep
inside the gallery space are three figures of Danaë on three canvases put
together, each measuring 194 x 261 cm. While the 9 canvases that make up the three Danaës
can be broken down or put together, they are not to be seen as puzzle images
that are assembled to produce a whole image or disassembled to break down a
completed image, because the image in each canvas can stand independently on
its own. Therefore, while the viewer
might think the original sketches at the entrance of the gallery have been
divided from the three Danaës, they also each depict their own world.
Each
of the body of the three Danaës is put together by a trapezoid and two
tetragons, or by three trapezoids[1].In
the context of manga, it seems that the shape of the canvas is an enlargement of
the frame in the manga book form, with some differences: the canvases are fused
together, not allowing any kind of space in between them. The inside and
outside of the frame are put together and images are continued or cut as if the
inside image is not differentiated from the outside. In context to manga, it’s closer to frame composition
in Shouju (girl) manga rather than
the common Shonen (boy) manga which
are drawn for males: the consumers of sexual objectification.
The
frame-boundary in manga is originally a visual index which divides the image
and time space. It promises that fragments of various spaces (image and time)
stays within the frames, and that time can intervene in the empty space between
the frames. While the Japanese manga —
which developed out ofWestern comics — captures the image in the frames from
multiple layers of vanishing points, Shouju manga, a trajectory of Manga,
employs extremely flat composition like text arrangement in literary work or
magazines. The “outside of the frame” in Shouju Manga is deemed as another
frame surrounded by other boundaries as the medium. On the outside of the
frames, symbolic elements — with emotional effect or a sense of movement like
water bubbles, light and plants — float around the image inside of the frame, juxtaposed
with the closed-up faces. This is not only just limited to the frame as a
signifier. As all lines in the painting
— like Danaë’s face and hair — become the boundary which divides the background
or is charged with effects, the objects outside of the boundaries move in and
out of the frames, interweaving the inside and outside.
While
such boundary/diagonal lines emphasize the extreme composition, they are also read
as compressed 3-dimensional coordinates. For example, in the game Dragon Ball Z: Extreme Butoden[2],
the diagonal lines rotate in the frame, expanding and contracting the depth and
distance of the space between characters, and also changing the direction of
the axis. The diagonal line — rotating, expanding and contracting — is similar
to a segment of an inner line connecting the two lines on the surface of a
sphere being projected on 2-dimensional world.
The continuous surface of the sphere is divided into lines, capturing a
segmented image as if it’s been filmed by a number of different cameras at
once.
The
configuration of the figure’s expression and body, as well as effects, divides
and assembles the boundaries in the center. Although confusing, such “absence
of context” visualizes intangible emotions. The body and expressions are subtly,
or at times excessively distorted. The distorted body of Danaë, drawn in Shonen
manga style, is pushed around in and out of the space in Shoujumanga style. In
the Shouju Manga space, the effect-giving-objects between the characters and
background define the space in front and behind of the figure, assisting in the
meticulous composition of one single event in which Danaë jumps up, erupting
with a particular emotion.
The
collision of two disparate archetypes — Western mythology and subculture manga/anime/game
— which Lee demonstrated in his last exhibition is happening again, this time
with meditation on the form of the medium. The female character, which is a
condensation of male desires, is completed through female desires, and the
completed flat surface transcends the perspective viewpoint and demands to be
re-defined. The transmuted chimera of
the white cube’s vantage point and the diagonal lines that traverse across the
elements of flat and 3-dimensional in the painting, has been titled “Nu-Frame”,
which breaks down and recombines the parts and assembled whole of the frame
form in “Nu-Type”.
<View,
Material, Tectonic Simulation>
Like
generators of subculture, Lee’s work begins in the digital space, but his work
always moves outside of the monitor, actualized intoa work of painting with concrete
scale placed in the white cube. Even in
the digital environment, however, the artist must keep on questioning the method
of construction and envisioning the exhibition space as 3-dimensional coordinates.
This
text was written before the actual exhibition, but as it’s easy to virtually
construct a 3-dimensional exhibition on the monitor by entering the exhibition
space floor plan and digital data of the works, the elaborately-visualized exhibition
space helped me to trace some issues the artist might have questioned before
the actual exhibition.
a. Unlike in reality where the
canvases must individually be produced, the figures can be drawn on the final
rectangular frames right away in the digital environment. The artist places another
simple layer on top of the image, and draws in hypothetical borders to cut out.
b. This border is actually a
conceptual line without any depth or width. The artist would have arranged the
objects by turning the layers of the lines on and off and zooming the image in
and out.
c. Now, the images and the borders
demand to be actualized in 3-dimensional space. Z point is added to the X-Y outline of the
canvas. Producing the actual relationship
between black line and the canvas in 3-dimensional program is similar to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fromthe architectural blue print in the virtual world
to the actual building in reality.
d. However, the boundaries do not top
down nor bottom up like the grids of skyscrapers in Manhattan or suburban
housing in the outskirts of the city.
e. Rather, boundaries flow following
the surface of the painting, and have a value of negative depth which sinks in
and thus elevates what borders it.
f. Minute gaps must be put on the
contact plane in order for perfect simulation. Chamfer angle must be put on the
canvas, and 0.x~2mm gap must be put in between the canvases, because the canvas
in reality can never make a seamless bonding with each other.
g. Ray tracing rendering[3]renders
the virtual black line on the 2-dimensional image into shade. The shade is not clear
and lucid likein the early sketches; when the pixel image is magnified, it
looks like land art in which terrains of paint has been dug up.
The
virtual exhibition in the 3D program demonstrates the translation process in
which borders are translated into the essentially indispensable material of paint
and canvas in painting. While translation
suggests failure in many cases, translating border — which divides medium and
not the figure itself — can give us the assurance that it can organize chaotic reality
and perception, rather than produce anxiety for failure.
First
of all, the new boundary of matter which organizes the image is defined as the
frame, which is an indispensible element of painting. This isn’t just like
layers in Photoshop; the material, paint, color and physical depth are all
different and interweaved three-dimensionally, because
it transcends the manga signifier and has become something that can be constructed
into a boundary made of material and form. The negative wall or the boundary,
indestructible by any force, can now be separated regardless of the image. On
the other hand, however, the gap between the frames must remain even if they
are put together.
The
thin border line in the rendered image which only measures about 1 pixel in
width does not only expand and become the empty space which measures a few millimeters
in between the frames in the manga, but allows us to imagine a new scale. It’s analogous to two directions from which to
capture the inner surface of the world, one from outside and one from the
center. The viewpoint from outside of the world is geometric pattern which cuts
through the faults and landscape of the paint. For example, it reminds us of
infrastructures like dams, roads and train tracks observed through satellite,
or the miniature model of Michael Heizer’s Double
Negative.On the other hand, the viewpoint from the center of the world transports
the 3D space, or the inner perspective of virtual world, into reality. In other
words, 2-dimensional HDR surrounding image[4]is
placed on top of the spherical world in the digital world, and the observer has
the experience of looking from the center of the spherical body to the
vanishing points in a flat way.
The
various ways of looking at the separation of elements takes the canvas from being
simply read as a window into an image. As
an abstract model with 1:1 or 1:Xproportion, the canvas demonstrates the simple
yet exquisite tectonic traces on the broken surface. The image inside the frame
does not resist completion, and the traces of painterly techniques steer away
from fixation on materiality. Therefore, it’s hard to see Nu-Frame as a process of completion where material and color is put
over sketches. Rather, the viewer repeatedly sees the construction and
deconstruction ofthe fragments of a world that’s completed too quickly. What we
may be seeing is the cross section of the warped structure-type that penetrates
the column, or the elements, of the new but uncertain composite figure.
[1] The
classification of the rectangular figure as is follows: rectangular >
trapezoid (isosceles trapezoid) > parallelogram > rectangle (diamond)
> square. The artist combined the
parts of quadrangles and trapezoids, to create a rectangle, which is a subclass
of this category.
[2] One of
the best-known games based on the cartoon Dragon
Ball Z. Some of them recorded 1 million in sales. In this fighting game, screen dividing system
which compresses time and distance was adopted in order to reproduce the world
view and physical law of Dragon Ball world.
[3] Ray
tracing rendering is a technology which illuminates light on the surface of the
object in virtual space, and makes pixel image based on the calculations of the
reflected light path. A rendering method
similar to in reality, and thus producing a high quality reproduction, it
requires very specific computer technology and its conditions are finicky to
produce effective results.
[4] High
Dynamic Range Imaging (HDRI) is a digital imaging technology which can produce
a much higher dynamic range than ordinary photograph. First developed to improve the quality of
computer rendering image, it was later improved to produce photographs of high
dynamic ranges from photographs of different exposures. It reproduces phenomena of changes in the
light.
‘참조’의 하이브리드: 여러 ‘전형성’이 한 기표에 섞일 때
장승연(<아트인컬처>수석기자)
『뉴 프레임』과 『뉴 타입』. 화려한 수식어는 제거된 채 최소한의 골격만 남은 듯한 간결한 단어들이다. 이는 각각 작가 이윤성의 개인전 제목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도록 이끄는 첫 번째 단어기도 하다. 만일 그의 작업을 보지 못한 채 제목만 접한다면, 아마도 다음 같은 측면에서 그의 작업을 감상하고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지난 개인전 제목인 『뉴 타입』은 어떤 새로운 유형이나 형태에 대한 질문에 작가의 관심이 드러난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 이번 전시 제목인 『뉴 프레임』이라는 단어에서는 회화의 기본 형식으로서의 '캔버스'나 '틀' 같은 구조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이 작가의 작업적 관심사가 내용적인 것에서 형식적인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과감히 유추해도 좋을까? 그런데 이 간결하고도 의미심장한 제목 사이의 연관성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꼭 짚어갈 수밖에 없는 그의 작업적 특징이 일단 이 글의 발목을 붙든다.
전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이윤성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매우 '일본만화 같다'. '일본만화 같은' 그 이미지는 관람객의 작품 감상에 매우 강력하게 개입하고 작용한다. 『뉴 프레임』, 『뉴 타입』이라는 전시 제목에서 시작된 어떤 연상들을 앞서거나 혹은 철저히 가려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만큼 특정적이기 때문이다.(물론 『뉴 타입』이라는 말 역시 일본만화의 용어를 작가가 가져온 것이다.) 더러는 작가에 대한 몇몇 오해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일본만화'를 참조하는 비슷한 세대의 한국작가들이 피해가기 힘든 한정된 해석의 틀을 떠올리자면 말이다. 그런데 이윤성의 작업에서 '일본만화 같은' 이미지는 다소 복잡하다. 그 복잡함을 이야기할 단서를 찾기 위해 다시 '제목'으로 되돌아간다. 다름 아닌 '작품'의 '제목'이다.
이번 전시작 제목은 「다나에」 시리즈다. 잘 알려졌다시피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 왕이 외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녀를 지하 방 안에 가두지만,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결국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는다.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인 동시에 서양미술사 속에서 빈번히 그려진 보편적인 도상 중 하나이다. 즉 이윤성의 작업에서 '일본만화'라는 이미지 아래 숨어 있는 중요한 참조물로 '서양미술사'가 자리한다. 이미 앞서 작가는 비너스 여신상에서 영감을 얻은 「토르소」를 비롯해, 「최후의 심판」, 「라오콘」, 「수태고지」 같은 서양미술사의 도상들을 작업에 꾸준히 참조해 왔다. 신화나 성경 내용을 가장 중요한 소재로 다뤘던 서양미술사 속 작품들은 대부분 고유의 전형성, 즉 타입을 가진다. '고전'이나 '도상'이라는 말 속에는 이 전형성이라는 의미가 이미 내포된 셈이다. 「다나에」 역시 코레조, 티치아노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부터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인 렘브란트, 그리고 1900년 이후 클림트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려 왔다. 그들의 작품에서 되풀이되던 전형성이란, 하얀 천이 깔린 침대 위에 기대어 누워서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다나에의 모습이다. 즉 다나에는 서양미술사 속에서 빈번히 묘사되어 온 '대상화된 누드의 전형' 중 하나다.
이윤성은 다나에의 전형성에 대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두 번의 재해석을 거친다. 일본만화 같은 그림의 표현 방식이 그 첫 번째 재해석이라면, 늘 수동적으로 묘사됐던 다나에의 감정에 주목한 점은 바로 작가의 두 번째 재해석이다. 황금비를 접하는 순간 다나에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주체이자 성격을 지닌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인물의 '표정'에 집중한 점이 그렇다. 웃고, 화를 내고, 조바심이 난 듯, 다양한 표정으로 발랄하게 그려진 다나에는 특정 캐릭터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방식으로 인간의 감정과 표정을 분할하여 그려냈다.
이윤성의 작업에 대해, 서양미술사 속 도상의 전형성을 일본만화 형식으로 재해석한 재치 있는 방식이라고 일반화시켜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미술사'와 '일본만화'라는 전혀 다른 문맥이 하나의 회화적 표면에서 교차되는 이 혼성의 장면은, 앞서 언급했듯이 단순히 재치 있는 이미지 처리 방식의 문제를 넘어 한층 복잡한 지점으로 나아간다. 바로 재해석을 위한 참조물로서 단순히 일본만화 '같은' 이미지를 넘어 일본만화의 '전형성'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윤성의 「다나에」는 미술사 속 수동적인 다나에와는 달리 다채로운 감정을 기반으로 한 표정을 주체적으로 표출하는 여성으로 거듭나지만, 일본만화 속 여성캐릭터가 지닌 전형적인 특징들, 과도하게 풍만한 신체로 여전히 남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시각적 기표로 탈바꿈된다. '일본풍의 만화'를 일컫는 '망가'를 인터넷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이용자의 연령에 따라 제한된 정보를 제공하는 상황이 증명하듯, 일본만화 역시 남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표현 방식을 하나의 '전형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서 일본만화가 위치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린 '일본만화 같은' 표현은 정확히 일본만화적이지도 않다. 대상화된 시각을 걸러내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혹은 그의 작품을 본 어느 일본만화 전문가(이자 오타쿠)의 언급처럼, 오히려 '일본만화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진 한국 만화'에 가깝다. 선정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또다른 전형성 말이다.
서양미술사 속 고전적 도상의 전형성과 일본만화의 전형성이 맞부딪히는 혼성의 장면. 거기에 '한국'에서 성장하며 '일본만화'라는 보편적인 시각적 환경의 영향을 받았던 '한국작가' 이윤성의 회화 속 이미지에서 전형적인 다나에라는 기의는 미끄러지면서 일본만화의 전형성으로 대체되고, 이는 또다시 이미지라는 기표에 고정되지 못한 채 한국적인 일본만화 표현이라는 상태로 대체되며 미끄러지는 복잡한 기표에 가깝다. 이것이 이윤성이 보여 주는 참조의 하이브리드 이미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작가가 이를 '프레임'의 문제로 확장시키며 한층 유희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형성'의 문제는 참조의 내용적 측면(타입)에서 나아가 '프레임'을 재해석하는 작가의 중요한 개념적 틀이 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꺼냈던 '전시 제목'에 대한 얘기로 다시 돌아갈 때다.
이번 전시에서 이윤성은 회화 프레임을 분할시키고, 전시장 벽을 다시 화면 삼아 재조합해 설치했다. 그가 직접 제작한 틀을 따라서 캔버스는 반듯한 사각형을 탈피한다. '변형 캔버스'가 1950년대 모더니즘 이 미술사 속에 등장했던 순간을 우리는 물론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윤성이 변형시킨 캔버스가 다시 한 번 서양미술사를 중요한 참조물로 소환시키고 있다고 말한다면, 다소 과한 시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변형의 실제 참조는 다시 일본만화로 향하면서 『뉴 타입』에서의 질문들을 자연스레 연결시킨다. 예상대로 그의 캔버스 프레임은 만화책의 페이지를 구성하는 컷의 분할을 참조한 것으로, 하나로 모이기도 하고 혹은 다른 방향으로 분산되기도 하는 각기 컷이 가리키는 선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다른 소실점을 이룬다.
이제 『뉴 프레임』展은 작가가 이제 일본만화 같은 얇고 표면적인 기표를 가지고 차츰 '회화'라는 거대한 질문을 탐색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전시로도 보인다. 더욱이 전시장에 「다나에」 연작과 함께 소개된 작은 소품들은, 만화의 컷에서 풍경이나 감정의 뉘앙스를 표현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유형들을 별도로 그린 것이다. 만화적 장치의 전형성, 즉 만화의 도상들이 회화의 추상이라는 장르로 기묘하게 연결된다. 이처럼 이윤성의 작업에는 추상과 구상, 캔버스와 평면 같은 회화의 오랜 질문들이 일본만화라는 참조의 틀을 거치면서 드러나고 있다. 다양한 참조물들이 부딪히며 야기되는 혼성의 모습이 어떻게 내용과 형식의 문제로 두루 확장되어 갈지, 작가가 과연 그 다음 과정을 어떻게 전개시킬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윤성의 다음 전시의 제목은 무엇일까?
작가는 대화 중에 자신의 전시제목들이 어찌 보면 "말장난 같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듯 흘린 말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말장난이야말로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지 못하는 가변적인 기표이자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혼성의 결정체, 바로 하이브리드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뉴 프레임』과 『뉴 타입』. 화려한 수식어는 제거된 채 최소한의 골격만 남은 듯한 간결한 단어들이다. 이는 각각 작가 이윤성의 개인전 제목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도록 이끄는 첫 번째 단어기도 하다. 만일 그의 작업을 보지 못한 채 제목만 접한다면, 아마도 다음 같은 측면에서 그의 작업을 감상하고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지난 개인전 제목인 『뉴 타입』은 어떤 새로운 유형이나 형태에 대한 질문에 작가의 관심이 드러난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 이번 전시 제목인 『뉴 프레임』이라는 단어에서는 회화의 기본 형식으로서의 '캔버스'나 '틀' 같은 구조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이 작가의 작업적 관심사가 내용적인 것에서 형식적인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과감히 유추해도 좋을까? 그런데 이 간결하고도 의미심장한 제목 사이의 연관성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꼭 짚어갈 수밖에 없는 그의 작업적 특징이 일단 이 글의 발목을 붙든다.
전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이윤성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매우 '일본만화 같다'. '일본만화 같은' 그 이미지는 관람객의 작품 감상에 매우 강력하게 개입하고 작용한다. 『뉴 프레임』, 『뉴 타입』이라는 전시 제목에서 시작된 어떤 연상들을 앞서거나 혹은 철저히 가려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만큼 특정적이기 때문이다.(물론 『뉴 타입』이라는 말 역시 일본만화의 용어를 작가가 가져온 것이다.) 더러는 작가에 대한 몇몇 오해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일본만화'를 참조하는 비슷한 세대의 한국작가들이 피해가기 힘든 한정된 해석의 틀을 떠올리자면 말이다. 그런데 이윤성의 작업에서 '일본만화 같은' 이미지는 다소 복잡하다. 그 복잡함을 이야기할 단서를 찾기 위해 다시 '제목'으로 되돌아간다. 다름 아닌 '작품'의 '제목'이다.
이번 전시작 제목은 「다나에」 시리즈다. 잘 알려졌다시피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 왕이 외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녀를 지하 방 안에 가두지만,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결국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는다.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인 동시에 서양미술사 속에서 빈번히 그려진 보편적인 도상 중 하나이다. 즉 이윤성의 작업에서 '일본만화'라는 이미지 아래 숨어 있는 중요한 참조물로 '서양미술사'가 자리한다. 이미 앞서 작가는 비너스 여신상에서 영감을 얻은 「토르소」를 비롯해, 「최후의 심판」, 「라오콘」, 「수태고지」 같은 서양미술사의 도상들을 작업에 꾸준히 참조해 왔다. 신화나 성경 내용을 가장 중요한 소재로 다뤘던 서양미술사 속 작품들은 대부분 고유의 전형성, 즉 타입을 가진다. '고전'이나 '도상'이라는 말 속에는 이 전형성이라는 의미가 이미 내포된 셈이다. 「다나에」 역시 코레조, 티치아노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부터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인 렘브란트, 그리고 1900년 이후 클림트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려 왔다. 그들의 작품에서 되풀이되던 전형성이란, 하얀 천이 깔린 침대 위에 기대어 누워서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다나에의 모습이다. 즉 다나에는 서양미술사 속에서 빈번히 묘사되어 온 '대상화된 누드의 전형' 중 하나다.
이윤성은 다나에의 전형성에 대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두 번의 재해석을 거친다. 일본만화 같은 그림의 표현 방식이 그 첫 번째 재해석이라면, 늘 수동적으로 묘사됐던 다나에의 감정에 주목한 점은 바로 작가의 두 번째 재해석이다. 황금비를 접하는 순간 다나에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주체이자 성격을 지닌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인물의 '표정'에 집중한 점이 그렇다. 웃고, 화를 내고, 조바심이 난 듯, 다양한 표정으로 발랄하게 그려진 다나에는 특정 캐릭터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방식으로 인간의 감정과 표정을 분할하여 그려냈다.
이윤성의 작업에 대해, 서양미술사 속 도상의 전형성을 일본만화 형식으로 재해석한 재치 있는 방식이라고 일반화시켜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미술사'와 '일본만화'라는 전혀 다른 문맥이 하나의 회화적 표면에서 교차되는 이 혼성의 장면은, 앞서 언급했듯이 단순히 재치 있는 이미지 처리 방식의 문제를 넘어 한층 복잡한 지점으로 나아간다. 바로 재해석을 위한 참조물로서 단순히 일본만화 '같은' 이미지를 넘어 일본만화의 '전형성'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윤성의 「다나에」는 미술사 속 수동적인 다나에와는 달리 다채로운 감정을 기반으로 한 표정을 주체적으로 표출하는 여성으로 거듭나지만, 일본만화 속 여성캐릭터가 지닌 전형적인 특징들, 과도하게 풍만한 신체로 여전히 남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시각적 기표로 탈바꿈된다. '일본풍의 만화'를 일컫는 '망가'를 인터넷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이용자의 연령에 따라 제한된 정보를 제공하는 상황이 증명하듯, 일본만화 역시 남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표현 방식을 하나의 '전형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서 일본만화가 위치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린 '일본만화 같은' 표현은 정확히 일본만화적이지도 않다. 대상화된 시각을 걸러내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혹은 그의 작품을 본 어느 일본만화 전문가(이자 오타쿠)의 언급처럼, 오히려 '일본만화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진 한국 만화'에 가깝다. 선정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또다른 전형성 말이다.
서양미술사 속 고전적 도상의 전형성과 일본만화의 전형성이 맞부딪히는 혼성의 장면. 거기에 '한국'에서 성장하며 '일본만화'라는 보편적인 시각적 환경의 영향을 받았던 '한국작가' 이윤성의 회화 속 이미지에서 전형적인 다나에라는 기의는 미끄러지면서 일본만화의 전형성으로 대체되고, 이는 또다시 이미지라는 기표에 고정되지 못한 채 한국적인 일본만화 표현이라는 상태로 대체되며 미끄러지는 복잡한 기표에 가깝다. 이것이 이윤성이 보여 주는 참조의 하이브리드 이미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작가가 이를 '프레임'의 문제로 확장시키며 한층 유희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형성'의 문제는 참조의 내용적 측면(타입)에서 나아가 '프레임'을 재해석하는 작가의 중요한 개념적 틀이 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꺼냈던 '전시 제목'에 대한 얘기로 다시 돌아갈 때다.
이번 전시에서 이윤성은 회화 프레임을 분할시키고, 전시장 벽을 다시 화면 삼아 재조합해 설치했다. 그가 직접 제작한 틀을 따라서 캔버스는 반듯한 사각형을 탈피한다. '변형 캔버스'가 1950년대 모더니즘 이 미술사 속에 등장했던 순간을 우리는 물론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윤성이 변형시킨 캔버스가 다시 한 번 서양미술사를 중요한 참조물로 소환시키고 있다고 말한다면, 다소 과한 시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변형의 실제 참조는 다시 일본만화로 향하면서 『뉴 타입』에서의 질문들을 자연스레 연결시킨다. 예상대로 그의 캔버스 프레임은 만화책의 페이지를 구성하는 컷의 분할을 참조한 것으로, 하나로 모이기도 하고 혹은 다른 방향으로 분산되기도 하는 각기 컷이 가리키는 선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다른 소실점을 이룬다.
이제 『뉴 프레임』展은 작가가 이제 일본만화 같은 얇고 표면적인 기표를 가지고 차츰 '회화'라는 거대한 질문을 탐색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전시로도 보인다. 더욱이 전시장에 「다나에」 연작과 함께 소개된 작은 소품들은, 만화의 컷에서 풍경이나 감정의 뉘앙스를 표현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유형들을 별도로 그린 것이다. 만화적 장치의 전형성, 즉 만화의 도상들이 회화의 추상이라는 장르로 기묘하게 연결된다. 이처럼 이윤성의 작업에는 추상과 구상, 캔버스와 평면 같은 회화의 오랜 질문들이 일본만화라는 참조의 틀을 거치면서 드러나고 있다. 다양한 참조물들이 부딪히며 야기되는 혼성의 모습이 어떻게 내용과 형식의 문제로 두루 확장되어 갈지, 작가가 과연 그 다음 과정을 어떻게 전개시킬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윤성의 다음 전시의 제목은 무엇일까?
작가는 대화 중에 자신의 전시제목들이 어찌 보면 "말장난 같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듯 흘린 말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말장난이야말로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지 못하는 가변적인 기표이자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혼성의 결정체, 바로 하이브리드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